"자네, 마왕의 손녀딸에 대해 들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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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은 건
오일장의 열띤 땡볕 아래 조조와 손권의 일기토 이야기를 한창 팔다가,
근처 점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나에게 화두를 던진 그 노인 역시도
옆자리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일어나기 직전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길가의 소문을 부풀리는 호사가를 상대하고,
이야기를 팔아 오늘의 밀면값을 벌고자 하는 이야기꾼인 나에게
마왕의 손녀딸이라는 화두는, 흘려듣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소재였다.
게다가 노인의 하관에 적당히 길게 기른 수염과 깔끔한 의복은
그가 한때나마 관의 사람였던 것 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를 향해 의자를 반 쯤 돌려 앉으며 물었다.
"마왕이라 함은, 약 오십 년 전에 장안에서 죽은 그 주지육림의 동탁 말씀이시오?"
"그렇네."
"흐음..."
동탁의 손녀딸이라면 그의 말년에 양자로 들였던 여포, 그의 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거니 싶어-
"혹 양자로 들였던 여포의 딸을 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여봉선에게는 딸이 있었지.
하지만 그의 딸인 여령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아는 체를 해 보았지만 노인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아는 체를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문득 노인이 그 여포의 호를 부른다는 사실에 표정이 굳었다.
아비가 셋이고 그 중 둘을 죽인 포악한 자. 그런 자에게 차리기에는 과한 예.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그가 살아있다면 그를 두려워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조조에게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호까지 붙여가며 예를 차리는 이 노인의 언행은
내가 반쯤 돌려앉았던 의자를 완전히 그를 향해 돌려 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사실 나도 마왕의 아들에 대해서는 본거나 들은 바가 없네.
단지 그의 딸인 동가 백이 위양군에 봉해지는걸 봤지.
그리고 그게 내가 말하는, 요즘 입에 오르내리는 마왕의 손녀딸일세."
"열 넷의 나이로 위양군에 봉해져 승상의 손녀딸로 호사를 누리다가
열 다섯이 되어 계례를 올리자마자 한 젊은 말단 관리와 눈이 맞았지.
그 세세한 과정이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결국 몰래 혼례까지 올렸다네.
계례를 올린지 채 일년이 되지 않고 일어난 일이니,
남자가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잡은 모양이야."
"그렇게 혼례를 마친 한 쌍은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네.
왜 그랬는지는 정말 아무도 모를거야.
다만 그 소식이 동탁이 있는 장안까지 도달했을 때는,
이미 마왕의 수급이 여봉선의 창에 떨어진 뒤 였네."
"장안에서 그 난리가 나고 동씨 집안의 모두가 왕윤에게 처형당하는 와중에,
야반도주한 덕분에 그 손녀딸은 목숨을 건진 거지.
둘에게 천운이 따른걸세."
"마왕의 무고를 부르짖는 부하들도 사실은 그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직전에 야반도주해 행방이 묘연해진 손녀딸은 그대로 잊혀졌네.
권력을 쥔 마왕이 죽고, 그 권속은 뿔뿔이 흩어져,
남은 것이라고는 동씨 성뿐인 그 손녀딸을 그 누가 찾으려 했겠는가?"
노인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마왕에게 손녀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장안에 있었다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근래 들어 호사가들이 덧붙인 이야기들이 많지.
무려 그 대상이 반백년 전 몰락한 마왕의, 야반도주한 손녀이니 말일세."
"사실은 손녀는 이미 장안에서 죽었는데,
그 남편이 그 복수를 하겠다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남자가 사실은 마왕이 몰락하기 전,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전장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반대로 살아남아 조조에게 의탁한 후에,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싸울 때 손녀딸이 출전했다가 사망하고
남편은 그대로 홀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라던가."
"이런 이야기들은 비극적이여서 그런지 드문드문 알더군."
"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실이 아닐세. 적어도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처럼.
말해선 안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태도가, 그가 하려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노인께서는 진실을 아는 것이냐고 물어보려던 내 입은,
그의 그런 태도에 감히 숨도 내뱉지 못했다.
그 때 장안의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사람일까?
아니면 설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멸망한 마왕의 손녀딸의 남편이라는 얘기를,
허풍으로라도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객에게 하진 않을 텐데
그렇게 말과 숨을 두어 번 고를 시간이 지나고,
적막 속에서 점원이 조심스레 찻잔 두 개를 내왔다.
늦은 점심시간에 손님이라고는 둘 뿐인 가게.
주문하지 않은 찻잔은 점주의 이야기값일 것이고,
마시기 쉽게 시원하게 나온 찻물은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점원의 작은 수작일 것이다.
노인은 찻잔을 보더니 입이 마른지 입을 우물거렸다.
노인의 말을 기다리는 나 역시도 입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온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목이 마른 티를 내면서도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물과 함께 하려는 이야기도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적막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나 역시도 이 적막이 깨트리기 어려워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찻잔만을 바라만 보던 중
"손녀딸과 그 남자는 한중땅에 숨었다네.
조조에게 가느니, 이용당할 뿐일테고.
원소에게 가는건 목숨을 건 도박이지.
마등군은 동탁이라면 치를 떠니 그쪽으로 갈 순 없었고,
여인의 몸으로는 넓은 중원 땅을 건너기도 힘드니,
가까우면서도 평화로운 한중이 숨기 가장 좋은 곳이었네."
"그리고 남자는 한중에서 작은 관직을 얻었네.
야반도주를 하긴 했으나 성실한 일처리로 명성이 좀 있었고
태수인 장로 역시 온화한 성품이니
타지라곤 해도 작은 관직을 하나 얻기에는 충분했어."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는데 성공했음을 자축이라도 하듯,
노인은 마치 술의 첫 잔을 들이키듯이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평화속에 무엇이 두려웠던 겐지..."
"남자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했네.
동탁 잔당의 추격인지,
여봉선의 무력인지,
왕윤의 망령인지...
어쩌면 난세의 시국 그 자체를 두려워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남자는 정체모를 무언가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살았네."
"남자는 온갖 일들을 대비했다네.
난세에 필요하다는 이유에 마음에도 없는 벗을 만들고,
정세에 끼어들기 위해 사람을 매수하고,
그러기 위한 돈이 없다면 공금을 횡령했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장들을 찾아가 용인술, 병법, 병기들을 공부했지"
"근방의 앵간한 명마, 명검, 명서들은 전부 그의 것이었네.
무재(無才)의 범인(凡人)이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지."
"처음 이 한중 땅에 들어올 때 까지만 해도,
그저 성실하다고 알려졌을 뿐인 사관 하나가
스무 해가 걸려 근방에서 손에 꼽히는 장군이 되었으니,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고 해도 되겠지."
무장이라는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정도 되는 명사의 아내가 사실은 동탁의 손녀딸이라니,
적어도 이번 달은 면국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속으로 주판을 굴렸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헌신적이었네.
집을 자주 비우고는 했지만
돌아갈 때는 아내에게 사줄 패물이나 미주를 사갖고 돌아갔거든.
금슬이 좋아 슬하에 딸도 둘 있었네.
한중 최고의 미인들이였지."
"그런 노력이 다행히 무색하게도, 한중 땅은 꽤 오래동안 평화로웠네.
사변이 있고 이십년 넘게 가까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조조와 손권이 싸우느라 이 한중 땅에는 관심이 없지."
"어쨌든 넘어온지 이십 년이 되던 해에, 그의 아내가 급사했다네.
서른... 서른 여섯이였을걸세.
변고 같은게 아니라, 그냥 천수가 짧았던 게지."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앞서 속으로는 주판을 튕기던,
이야기를 팔아 몇 푼 더 챙기려던 재담꾼을 퇴장시키에 충분했다.
재담꾼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대신 안타까움에 탄성을 내뱉는 관객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형장의 핏빛 이슬로 사라진 것도,
전장의 이름모를 흙으로 바스라진 것도 아니네.
가족들이 모인 처소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지."
오랜 이야기에 숨이 겨운지, 노인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자 처음부터 노인을 제외하고도 숨이 세 개이던 점포 안에서,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머지 세 개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한중 태수 밑에서 일했네.
장성한 딸 둘이 사관한 것이 마음에 걸린게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중원에 다른 호족이 모두 패망하여 조조와 손권만이 남았을 때,
남자는 태수에게 하야하기를 청했네.
조조와 손권이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이상, 한중과 그의 두 딸에게는 별고가 없으리라 생각했지."
"남자는 그의 보물을 전부 두 딸에게 물려주고, 그대로 고향으로 귀향했네.
아내와 처음 만난 곳이라며, 거기서 여생을 보내길 원하더군."
그는 이제는 진짜 끝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세."
노인은 숨도 고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점포 밖으로 향했다.
아직 하늘에 높게 걸린 햇살이 문을 나서는 노인의 그림자를 점포 안으로 그려냈다.
나는 몰려드는 생각에 멍하니 앉아있다 허둥지둥 그림자를 따라나섰다.
오일장의 마지막 오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인파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노인의 발걸음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유가 무엇이오?"
급한 마음에 노인을 엉거주춤 따라가며 던진 내 질문은 앞뒤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원래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서스럼없이,
내가 노인을 따라나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요즘 드문드문이긴 해도 동가 백의 끝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더군.
그러니 그 끝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네."
그러니까 즉, 이 노인은 내가 재담꾼인 것을 알고
일부러 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일개 재담꾼 따위는 퇴장시켜버릴 것도 모른 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걸어나갔다.
나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아니 역시"
"동탁의 말단 관리, 이유모를 야반도주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반란군, 전장에서 살해당한 백면서생, 이용당하고 버려진 홀아비.
무엇으로 남겨도 좋네. 그것들은 다 내 이름이니까."
노인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일장 마지막 날의 인파는, 분명 첫날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노인을 나는 감히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세 번째에는, 지켜냈다네"
이해할 수 없는 한 많은 목소리가, 내가 아는 노인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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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novelchannel/98343762
기존 글의 후일담을 어떻게든 각색해서 써왔음(이라는 작가의 말)
오일장의 열띤 땡볕 아래 조조와 손권의 일기토 이야기를 한창 팔다가,
근처 점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나에게 화두를 던진 그 노인 역시도
옆자리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일어나기 직전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길가의 소문을 부풀리는 호사가를 상대하고,
이야기를 팔아 오늘의 밀면값을 벌고자 하는 이야기꾼인 나에게
마왕의 손녀딸이라는 화두는, 흘려듣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소재였다.
게다가 노인의 하관에 적당히 길게 기른 수염과 깔끔한 의복은
그가 한때나마 관의 사람였던 것 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를 향해 의자를 반 쯤 돌려 앉으며 물었다.
"마왕이라 함은, 약 오십 년 전에 장안에서 죽은 그 주지육림의 동탁 말씀이시오?"
"그렇네."
"흐음..."
동탁의 손녀딸이라면 그의 말년에 양자로 들였던 여포, 그의 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거니 싶어-
"혹 양자로 들였던 여포의 딸을 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여봉선에게는 딸이 있었지.
하지만 그의 딸인 여령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아는 체를 해 보았지만 노인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아는 체를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문득 노인이 그 여포의 호를 부른다는 사실에 표정이 굳었다.
아비가 셋이고 그 중 둘을 죽인 포악한 자. 그런 자에게 차리기에는 과한 예.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그가 살아있다면 그를 두려워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조조에게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호까지 붙여가며 예를 차리는 이 노인의 언행은
내가 반쯤 돌려앉았던 의자를 완전히 그를 향해 돌려 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사실 나도 마왕의 아들에 대해서는 본거나 들은 바가 없네.
단지 그의 딸인 동가 백이 위양군에 봉해지는걸 봤지.
그리고 그게 내가 말하는, 요즘 입에 오르내리는 마왕의 손녀딸일세."
"열 넷의 나이로 위양군에 봉해져 승상의 손녀딸로 호사를 누리다가
열 다섯이 되어 계례를 올리자마자 한 젊은 말단 관리와 눈이 맞았지.
그 세세한 과정이야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결국 몰래 혼례까지 올렸다네.
계례를 올린지 채 일년이 되지 않고 일어난 일이니,
남자가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잡은 모양이야."
"그렇게 혼례를 마친 한 쌍은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네.
왜 그랬는지는 정말 아무도 모를거야.
다만 그 소식이 동탁이 있는 장안까지 도달했을 때는,
이미 마왕의 수급이 여봉선의 창에 떨어진 뒤 였네."
"장안에서 그 난리가 나고 동씨 집안의 모두가 왕윤에게 처형당하는 와중에,
야반도주한 덕분에 그 손녀딸은 목숨을 건진 거지.
둘에게 천운이 따른걸세."
"마왕의 무고를 부르짖는 부하들도 사실은 그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직전에 야반도주해 행방이 묘연해진 손녀딸은 그대로 잊혀졌네.
권력을 쥔 마왕이 죽고, 그 권속은 뿔뿔이 흩어져,
남은 것이라고는 동씨 성뿐인 그 손녀딸을 그 누가 찾으려 했겠는가?"
노인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마왕에게 손녀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장안에 있었다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근래 들어 호사가들이 덧붙인 이야기들이 많지.
무려 그 대상이 반백년 전 몰락한 마왕의, 야반도주한 손녀이니 말일세."
"사실은 손녀는 이미 장안에서 죽었는데,
그 남편이 그 복수를 하겠다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남자가 사실은 마왕이 몰락하기 전,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전장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라던가."
"반대로 살아남아 조조에게 의탁한 후에,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싸울 때 손녀딸이 출전했다가 사망하고
남편은 그대로 홀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라던가."
"이런 이야기들은 비극적이여서 그런지 드문드문 알더군."
"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실이 아닐세. 적어도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처럼.
말해선 안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태도가, 그가 하려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노인께서는 진실을 아는 것이냐고 물어보려던 내 입은,
그의 그런 태도에 감히 숨도 내뱉지 못했다.
그 때 장안의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사람일까?
아니면 설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멸망한 마왕의 손녀딸의 남편이라는 얘기를,
허풍으로라도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객에게 하진 않을 텐데
그렇게 말과 숨을 두어 번 고를 시간이 지나고,
적막 속에서 점원이 조심스레 찻잔 두 개를 내왔다.
늦은 점심시간에 손님이라고는 둘 뿐인 가게.
주문하지 않은 찻잔은 점주의 이야기값일 것이고,
마시기 쉽게 시원하게 나온 찻물은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점원의 작은 수작일 것이다.
노인은 찻잔을 보더니 입이 마른지 입을 우물거렸다.
노인의 말을 기다리는 나 역시도 입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온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목이 마른 티를 내면서도 찻잔의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물과 함께 하려는 이야기도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적막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나 역시도 이 적막이 깨트리기 어려워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찻잔만을 바라만 보던 중
"손녀딸과 그 남자는 한중땅에 숨었다네.
조조에게 가느니, 이용당할 뿐일테고.
원소에게 가는건 목숨을 건 도박이지.
마등군은 동탁이라면 치를 떠니 그쪽으로 갈 순 없었고,
여인의 몸으로는 넓은 중원 땅을 건너기도 힘드니,
가까우면서도 평화로운 한중이 숨기 가장 좋은 곳이었네."
"그리고 남자는 한중에서 작은 관직을 얻었네.
야반도주를 하긴 했으나 성실한 일처리로 명성이 좀 있었고
태수인 장로 역시 온화한 성품이니
타지라곤 해도 작은 관직을 하나 얻기에는 충분했어."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는데 성공했음을 자축이라도 하듯,
노인은 마치 술의 첫 잔을 들이키듯이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평화속에 무엇이 두려웠던 겐지..."
"남자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했네.
동탁 잔당의 추격인지,
여봉선의 무력인지,
왕윤의 망령인지...
어쩌면 난세의 시국 그 자체를 두려워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남자는 정체모를 무언가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살았네."
"남자는 온갖 일들을 대비했다네.
난세에 필요하다는 이유에 마음에도 없는 벗을 만들고,
정세에 끼어들기 위해 사람을 매수하고,
그러기 위한 돈이 없다면 공금을 횡령했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장들을 찾아가 용인술, 병법, 병기들을 공부했지"
"근방의 앵간한 명마, 명검, 명서들은 전부 그의 것이었네.
무재(無才)의 범인(凡人)이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지."
"처음 이 한중 땅에 들어올 때 까지만 해도,
그저 성실하다고 알려졌을 뿐인 사관 하나가
스무 해가 걸려 근방에서 손에 꼽히는 장군이 되었으니,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고 해도 되겠지."
무장이라는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정도 되는 명사의 아내가 사실은 동탁의 손녀딸이라니,
적어도 이번 달은 면국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속으로 주판을 굴렸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헌신적이었네.
집을 자주 비우고는 했지만
돌아갈 때는 아내에게 사줄 패물이나 미주를 사갖고 돌아갔거든.
금슬이 좋아 슬하에 딸도 둘 있었네.
한중 최고의 미인들이였지."
"그런 노력이 다행히 무색하게도, 한중 땅은 꽤 오래동안 평화로웠네.
사변이 있고 이십년 넘게 가까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조조와 손권이 싸우느라 이 한중 땅에는 관심이 없지."
"어쨌든 넘어온지 이십 년이 되던 해에, 그의 아내가 급사했다네.
서른... 서른 여섯이였을걸세.
변고 같은게 아니라, 그냥 천수가 짧았던 게지."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앞서 속으로는 주판을 튕기던,
이야기를 팔아 몇 푼 더 챙기려던 재담꾼을 퇴장시키에 충분했다.
재담꾼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대신 안타까움에 탄성을 내뱉는 관객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형장의 핏빛 이슬로 사라진 것도,
전장의 이름모를 흙으로 바스라진 것도 아니네.
가족들이 모인 처소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지."
오랜 이야기에 숨이 겨운지, 노인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자 처음부터 노인을 제외하고도 숨이 세 개이던 점포 안에서,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머지 세 개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한중 태수 밑에서 일했네.
장성한 딸 둘이 사관한 것이 마음에 걸린게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중원에 다른 호족이 모두 패망하여 조조와 손권만이 남았을 때,
남자는 태수에게 하야하기를 청했네.
조조와 손권이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이상, 한중과 그의 두 딸에게는 별고가 없으리라 생각했지."
"남자는 그의 보물을 전부 두 딸에게 물려주고, 그대로 고향으로 귀향했네.
아내와 처음 만난 곳이라며, 거기서 여생을 보내길 원하더군."
그는 이제는 진짜 끝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세."
노인은 숨도 고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점포 밖으로 향했다.
아직 하늘에 높게 걸린 햇살이 문을 나서는 노인의 그림자를 점포 안으로 그려냈다.
나는 몰려드는 생각에 멍하니 앉아있다 허둥지둥 그림자를 따라나섰다.
오일장의 마지막 오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인파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노인의 발걸음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유가 무엇이오?"
급한 마음에 노인을 엉거주춤 따라가며 던진 내 질문은 앞뒤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원래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서스럼없이,
내가 노인을 따라나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요즘 드문드문이긴 해도 동가 백의 끝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더군.
그러니 그 끝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네."
그러니까 즉, 이 노인은 내가 재담꾼인 것을 알고
일부러 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일개 재담꾼 따위는 퇴장시켜버릴 것도 모른 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걸어나갔다.
나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아니 역시"
"동탁의 말단 관리, 이유모를 야반도주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반란군, 전장에서 살해당한 백면서생, 이용당하고 버려진 홀아비.
무엇으로 남겨도 좋네. 그것들은 다 내 이름이니까."
노인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일장 마지막 날의 인파는, 분명 첫날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노인을 나는 감히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세 번째에는, 지켜냈다네"
이해할 수 없는 한 많은 목소리가, 내가 아는 노인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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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글의 후일담을 어떻게든 각색해서 써왔음(이라는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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