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전투 때문에 가능했었던 흥남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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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 때문에 가능했었던 흥남철수작전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장진호전투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 사진은 철수하는 장진호전투부대 (1950년 11월 27일 ~ 1950년 12월 11일)
남부두로 몰려 오고
피난민들을 수송하기 위해 수많은 군수물자를 하역 야적하고 있다(군수품은 부두 철수시 폭파시켜 사용불능케 했다)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유엔군들의 영결장면이다(이들은 고국으로 가지 못했을것이다)
운 좋게 배에 승선한 피난민들(그들의 미래는 암담했다)
운 좋게 배에 승선한 피난민들(그들의 미래는 암담했다)
전선에서 용케 살아남은 유엔군들이 승선하기 위해 부두로 집결하고 있다
피난민 철수를 위해 하역 야적한 군수물자와 부두시설을 폭파하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며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피난민의 인파
두사람의 피난민이 필사적으로 그물사다리를 오르고 있다(오르다가 떨어 사망한 사람들 많았다고 함)
유엔군이 장진호전투에서 극한까지 버텨서 흥남철수가 가능했음
미군이 피난민 10만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난 바로 다음날 중공군이 도착했음
군수품대신 피난민 10만명을 태우기 위해 남겨둔 미군의 군수품들은 흥남철수할때 모두 폭파시켰고
중공군이 흥남부두에 도착했을때는 폭발로 허허벌판이 된 흥남부두만 보게되었음
당시 장진호전투로 유엔군 사상자는 총 17000여명이다.
그중 사망자는 1029명 실종자는 4894명 부상자는 4582명 동상이나 비전투요인에 의한 사상자는 7338명이였음
많은 유엔군의 희생으로 10만명의 피난민이 탈출 할 수 있게된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