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의 삶을 알아보자: 노비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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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사생활을 알아보자
노비의 운명은 그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자애로운 주인은 노비에게 최소한 인간 대접을 해주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주인과 노비 관계는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마치 군신이나 부자 관계와도 같았기에, 노비가 충성을 다하면 주인도 그에 대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어떤 경우에는 부림이나 신공에서 면제해주는 경우도, 아예 양인으로 해방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축을 세는 단위(生口)로 불렸으며 예(禮)가 미치지 않는 영역의 존재였던 노비들은 언제든 주인의 변덕에 의해 비참한 운명을 맞을 수 있는 노릇이었다.
재산은 언제든지 주인에게 강탈당할 수 있었다.
처와 자식 또한 뺏길 수 있었다.
평생토록 살던 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다.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할 수 있었다.
밥을 먹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미필적이라 하더라도 그 목숨이 주인에 의해 거두어질 수 있었다.
# 성생활과 재생산
노비의 성과 혼인 생활은 주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특히 여성 노비인 비자(婢子)는 종종 양반의 손쉬운 농락거리가 되곤 하였으며, 비첩(婢妾)으로 취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나하나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각종 골계담과 야화 등지에서 양반과 비자 사이의 성관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오죽하면 "종년 간통은 누운 소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다.
양반에 의한 성적 침탈의 대상은 주로 주인 곁에서 온갖 잡무를 도맡아하는 앙역노비(仰役奴婢)나 사환노비(使喚奴婢)들이었지만 (거주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率居奴婢)라고 부르기도 함), 경우에 따라선 외방에 나가서 신공(身貢)만을 납부하기로 되어있는 납공노비(納貢奴婢)에까지 그 손길이 미칠 수도 있었다. 주인은 바깥에 나가사는 노비들을 언제든지 안으로 불러들여 기르고 부릴(부리고 쓰는 것을 앙역(仰役)이라고 한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감히 남편이랍시고" 마음에 둔 비자(婢子)와 제 멋대로 "붙어먹는" 노자(奴子)를 떼어놓을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천한 자식들
그렇게 양반과의 관계로 태어난 비자, 혹은 비첩의 자식들 또한 날때부터 대대로 노비로 부려졌다. 사대부의 집안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 비가양부소생(婢嫁良夫所生), 즉 비첩산(婢妾産)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아비 모르는(父不知) 채로 노비의 삶을 살거나 설령 친부에 의해 인지되었어도 얼자(孽子)로 불리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아버지가 매우 높은 신분(2품 이상은 날 때부터 양인, 5품 이상은 속신(贖身)을 통한 종량이 가능)일 경우에는 양인(良人)이 될 수도 있었으나, 신분상이나 재산상에 있어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진 못한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들은 아버지나 배다른 형제들에게 직접 노비로 부림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래도 피가 섞인 얼남매(孼男妹)를 부리는 상황이 껄끄러웠던 일부 양반들은 이들을 다른 양반가의 노비와 교환하거나 아예 팔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정확히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경우(父不知)도 많았기에, 분명 어떤 양반들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부리곤 했을 것이다.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들이 양인과 혼인하는 상황을 기꺼이 반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천교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주인집 노비로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노비들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혼인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재산 상의 손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특히 자신의 노자가 다른 양반의 비자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은 어미의 주인에게 종속되었다. 따라서 주인의 입장에서 노비들간의 허락없는 혼인은 언제든 주인의 재산에 해를 끼치려는 불충이자 간음(奸)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 노비 가족
함경남도 문천군 관노비
실로 양반들의 시선에서 노비들은 음탕하고 문란한 존재로 비추어졌다. 양반들에 의해 정상적인 혼인이 통제되어 잡혼하곤 했던 노비들이 강고한 친족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그러나 노비들은 그들 나름대로 혼인에 대한 윤리를 발달시켰다. 양반들의 일기 곳곳에서 조상이나 배우자에 대한 제사를 정성스레 지내는 노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비 일가족은 대문과 붙어있는 행랑채에 함께 살거나 양반댁 근처에 초가집을 지어 살곤했다.
노비 가족은 주로 소규모였는데 보통 4인 내외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비 일가족은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살지라도 제각기 다른 주인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속과 매매 과정에서 자주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놓는 것은 감시를 용이하게 하여 도망을 예방하고 신공(身貢)을 철저히 징수하는 데 이익이 있었다.
(계속)
노비의 운명은 그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자애로운 주인은 노비에게 최소한 인간 대접을 해주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주인과 노비 관계는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마치 군신이나 부자 관계와도 같았기에, 노비가 충성을 다하면 주인도 그에 대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어떤 경우에는 부림이나 신공에서 면제해주는 경우도, 아예 양인으로 해방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축을 세는 단위(生口)로 불렸으며 예(禮)가 미치지 않는 영역의 존재였던 노비들은 언제든 주인의 변덕에 의해 비참한 운명을 맞을 수 있는 노릇이었다.
재산은 언제든지 주인에게 강탈당할 수 있었다.
처와 자식 또한 뺏길 수 있었다.
평생토록 살던 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다.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할 수 있었다.
밥을 먹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미필적이라 하더라도 그 목숨이 주인에 의해 거두어질 수 있었다.
# 성생활과 재생산
노비의 성과 혼인 생활은 주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특히 여성 노비인 비자(婢子)는 종종 양반의 손쉬운 농락거리가 되곤 하였으며, 비첩(婢妾)으로 취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나하나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각종 골계담과 야화 등지에서 양반과 비자 사이의 성관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오죽하면 "종년 간통은 누운 소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다.
양반에 의한 성적 침탈의 대상은 주로 주인 곁에서 온갖 잡무를 도맡아하는 앙역노비(仰役奴婢)나 사환노비(使喚奴婢)들이었지만 (거주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率居奴婢)라고 부르기도 함), 경우에 따라선 외방에 나가서 신공(身貢)만을 납부하기로 되어있는 납공노비(納貢奴婢)에까지 그 손길이 미칠 수도 있었다. 주인은 바깥에 나가사는 노비들을 언제든지 안으로 불러들여 기르고 부릴(부리고 쓰는 것을 앙역(仰役)이라고 한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감히 남편이랍시고" 마음에 둔 비자(婢子)와 제 멋대로 "붙어먹는" 노자(奴子)를 떼어놓을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천한 자식들
그렇게 양반과의 관계로 태어난 비자, 혹은 비첩의 자식들 또한 날때부터 대대로 노비로 부려졌다. 사대부의 집안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 비가양부소생(婢嫁良夫所生), 즉 비첩산(婢妾産)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아비 모르는(父不知) 채로 노비의 삶을 살거나 설령 친부에 의해 인지되었어도 얼자(孽子)로 불리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아버지가 매우 높은 신분(2품 이상은 날 때부터 양인, 5품 이상은 속신(贖身)을 통한 종량이 가능)일 경우에는 양인(良人)이 될 수도 있었으나, 신분상이나 재산상에 있어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진 못한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들은 아버지나 배다른 형제들에게 직접 노비로 부림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래도 피가 섞인 얼남매(孼男妹)를 부리는 상황이 껄끄러웠던 일부 양반들은 이들을 다른 양반가의 노비와 교환하거나 아예 팔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정확히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경우(父不知)도 많았기에, 분명 어떤 양반들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부리곤 했을 것이다.
양반들은 자신의 노비들이 양인과 혼인하는 상황을 기꺼이 반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천교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주인집 노비로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노비들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혼인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재산 상의 손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특히 자신의 노자가 다른 양반의 비자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은 어미의 주인에게 종속되었다. 따라서 주인의 입장에서 노비들간의 허락없는 혼인은 언제든 주인의 재산에 해를 끼치려는 불충이자 간음(奸)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 노비 가족
함경남도 문천군 관노비
실로 양반들의 시선에서 노비들은 음탕하고 문란한 존재로 비추어졌다. 양반들에 의해 정상적인 혼인이 통제되어 잡혼하곤 했던 노비들이 강고한 친족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그러나 노비들은 그들 나름대로 혼인에 대한 윤리를 발달시켰다. 양반들의 일기 곳곳에서 조상이나 배우자에 대한 제사를 정성스레 지내는 노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비 일가족은 대문과 붙어있는 행랑채에 함께 살거나 양반댁 근처에 초가집을 지어 살곤했다.
노비 가족은 주로 소규모였는데 보통 4인 내외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비 일가족은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살지라도 제각기 다른 주인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속과 매매 과정에서 자주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놓는 것은 감시를 용이하게 하여 도망을 예방하고 신공(身貢)을 철저히 징수하는 데 이익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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