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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2 : 폴리 아 되>에 관한 옹호론 (1,2편 스포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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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568 회 작성일 24-10-16 17: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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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커2편을 보았습니다. 평이 대체로 좋지 않아 큰 기대 없이 보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인상은 아마 제가 <조커> 1편을 비롯해 딱히 DC 유니버스의 팬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후술할 글에서 간략히 드러나는 제 예술관 때문인지도 모르겠고요. 어쨌거나 <조커2 : 폴리 아 되>의 예고편이 일종의 "낚시질"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감독이 관객들을 훈계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감상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물론 존중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2편이 충분히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좋은 작품인 것으로 보여,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조금 풀어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 작품에 가해지는 여러가지 비판들이 과연 이 작품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논거가 될 수 있는지도 간략히 논하고자 합니다. 



(스포 주의)


--


1. <조커> 1편의 위험성



 두괄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조커> 1편이 묘한 위험성을 내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부정하기 어렵게, <조커>는 아서플렉이 조커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분출시킨다. <조커>의 큰 줄기는 아서 플렉이 사회로부터 (소위 정상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광범위하게 배제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분노와 울분이 극단적인 범죄로 표출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이 같은 서사적 구조 하에서, 와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와 점차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은 관객을 아서의 "통쾌한" 복수극에 쉽게 이입할 수 있게끔 기능한다. 물론 아서의 잔혹한 범죄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분명 눈을 질끈 감으며 조커를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조커> 후반부의 연출은 아서 플렉에게 고담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영웅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끔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조커>1편 후반부의 아서에게서 빈자들을 위한 영웅의 아우라를 읽어내는 것 자체가 오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타인에게서 한 줌의 인정과 공감과 주목을 원했을 뿐, 그에게는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하게도 작중의 아서플렉 또한 "나는 그런 정치 같은 것은 모른다"고 둘러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면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조커> 1편의 후반부는 몇몇 핵심 장면을 통해 아서플렉(혹은 관객)의 시선을 가난한 자 대 부유한 자의 대립구도로 집중시키고 있고(가령 플렉의 감정이 이입된 소피가 부자들을 증오하는 대사, 빈자 대 부자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소요, 플렉과 머레이의 대화), 플렉이 가면을 쓴 군중들로부터 영웅 "조커"로 추앙받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고 폭발적으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연출적 결과물을 놓고, 감독이 혹은 <조커>라는 영화가 이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령 "부자들을 쏴 죽여라")를 지지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아주 나이브할 것이다. <조커>의 개봉 이후 이 영화가 감정적 울분의 표출과 폭력성을 승인하는 영화라는 식의 논쟁이 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길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이 영화가 그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구태여 <조커>의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감독의 진의가 무엇이냐와 별개로,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정말이지 유력한 해석본이 어떤 것이 될 것이냐와 별개로, 이 영화가 관객을 어떤 식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논하기 위함이다.

 나는 <조커> 1편이 단지 역사상 최고의 빌런으로 여겨지고 있는 조커의 탄생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안티 히어로물"의 일종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에 영화나 예술을 장르적 쾌감이나 유희의 획득을 위한 도구로서 접근하거나,  예술의 자율성 테제를 강하게 옹호하는 평자들은 특히 <조커>를 이런 식으로 "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다. 오락(히어로물)은 오락일 뿐, 괜히 진지해지지 말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예술관을 구구절절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이와 같은 접근법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독법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커> 1편은 고담시를 배경으로 조커의 탄생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계층의 삶과 연결시키면서 모종의 사회심리학적 드라마의 위상을 획득하는 작품이라고 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조커>1편이 강한 정치적사회적 함의를 갖는 "르포"의 일환으로 읽혀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커>는 단순히 (예술적)감상과 유희의 대상인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단지 유쾌하게 밈화되어 소비되어야 하는 흔하디 흔한 안티 히어로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나에게 굉장히 기이하게 들린다. <조커>는 아주 정당하게도, 정치적 논쟁의 대상 혹은 매개체이다. 물론, 나는 <조커>를 둘러싼 논쟁이 단순히 이 영화가 배제된 자들의 폭력성을 은연중 정당화하는지 아닌지의 차원에 머무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실제로 <조커>에 대한 개봉 당시의 많은 비평들은 우리가 조커의 탄생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 또한 되돌아봐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는 <조커>라는 영화가 실제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아서 플렉의 삶이 정말 불쌍한가?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소름끼치게 맥락 없는 웃음을 웃는 아서 플렉같은 "광인"을 어디까지 용인하고 포용할 수 있는가? 아니, 반대로 최소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애티튜드를 갖추지 못한 플렉에게 "일반인"들이 반감을 갖는 것이 과연 문제가 되는가? 어쩌면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무제한적 관용도 배제도 모두 답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사이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플렉의 "비정상성"이 발생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복지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혹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에 기인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누군가는 <조커>와 같은 대중 오락영화에서 이 같은 성찰이나 교훈의 지점을 운운하는 것은 나이브하다거나,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지 말라거나, 이 같은 문제의식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진부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논평할 수 있겠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영화는 시청각적 의미소들의 총체로 구성되는 "의미"의 총체로서, 거기서 "메시지"를 거세하는 것은 거의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그 의미의 총체에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정보들도 있겠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특유하게 갖는 강점이 메시지보다는 시청각적 표현이나 그것으로부터의 체험에 있다고 할지라도, 메시지로부터 자유롭거나 완벽하게 분리된 영상적 완성물 따위를 나는 단 한번도 접한 적이 없고 그것을 개념적으로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아주 많은 경우에 영화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조커>가 현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르포적 함의를 시각적 형상화의 방식으로 충분히 의미 있고 새롭게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은 <조커>의 작품성을 판가름 하는 핵심 기준 중 하나인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플렉의 살인 행위는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적이고, 끔찍하며, 사회로부터 추방당해야 하는 것이고, 법적으로 유죄임이 너무나 명백하지만, 조커가 탄생하기까지 무언가가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못했음을(그것이 부모나 친구나 동료의 사랑이든, 제도의 지원이든) 또한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 나는 이것이 비록 "진부한" 메시지이기는 해도, 영화 <조커>가 핵심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아서 플렉의 파괴적 복수극,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은근한 카타르시스와 충분히 양립 가능하게끔 만드는 연출적 선택지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조커1>은 (내 관점에서 보면) 성찰과 쾌감을 양립시키는 것에 실패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도달하게 되면, 관객은 조커의 탄생에 관한 생애사심리드라마적 탐구의 과정을 시야에서 놓쳐 손쉽게 부자와 빈자의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도에 시선을 집중시키게 되고, 폭발하는 복수가 자아내는 카타르시스에 매료되게 된다. 혹은 그렇게 되도록 이 영화는 구성되었다. 나는 이 영화의 오락성 혹은 쾌감이 아서 플렉이라는 취약계층을 발생시키는 미시적구조적 기제들로 다시금 눈을 돌리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커>의 전반부 또한 개선의 여지가 더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핵심적 실패의 지점은 후반부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2. 보완 : 만화경적 현미경



 <조커2 : 폴리 아 되>는 <조커>1편에서 발생했던 실패의 지점을 보완하기 위한 기획인 것처럼 보인다. 그 기획은 다음의 슬로건으로 압축된다. 당신, 다시 아서의 목소리를 들어라. 조커가 아닌 아서의 목소리 말이다. 이는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도 같다. 만약 조커가 토크쇼 진행자인 머레이 플랭클린의 머리에 총알을 꽂아넣지 않았다면, 과연 <조커>에 대한 대중적 열광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 질문이 우습다고 느낄 수 있겠다. 당연히, 영화이므로 가능한 그 무자비한 폭력이야말로 <조커>의 매력이자 열광의 포인트인 것이라고 말이다. 조커에 열광하지 말고 아서플렉에 주목하라는 주문은 어줍잖은 선민의식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어찌되었든, <조커2>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선은 마치 아서에게 "만화경적 현미경"을 들이미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아서플렉-조커"는 자기분열적 인물이며 제3자의 시선으로 그 성격을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인물이다. 나는 "아서플렉"이나 "조커"나 모두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아서플렉은 정돈된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끔하게 표현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이다. 교육의 부재이든, 지속된 학대가 낳은 정신적 피폐상태이든, 모종의 이유들로 인해 그는 소위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힘든 인물이 되어 있다. 조커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커는 카오스의 화신이다.

 나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의 목소리를 비추고자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엄밀히 보자면, 특히나 아서플렉의 내적 자기분열상태와 언어능력의 결여로 말미암아, "아서플렉"에 대한 관찰은 "조커"에 대한 관찰과 쉽사리 분리되지 않는다. 초반의 취조실에서 변호사는 아서에게 (아마도)사형죄를 피할 수 있는 전략을 설명한다. 그런데 변호사로부터 연이어 이어지는 질문에 어떤 속시원한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담배를 요구하거나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이 사람은 아서 플렉일까 혹은 조커일까?

 물론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아캄수용소와 법정에서 주로 목도하게 되는 인물이 아마도 "조커"가 아닌 "아서플렉"임이 유력하다는 증거들이 등장한다. 1편에서보다 더욱 피골이 상접한 이 인물에게는 조커가 보여주던 표독스런 광기가 다소간 거세되어있다. 그는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고, 다시금 타인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한 새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있다. 이는 누가 봐도 조커라기보다 아서 플렉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위태롭고 나약한 아서플렉은 끊임없이 조커라는 망령이자 유혹에 시달린다. 그는 조커가 아닌 아서플렉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사회가 원망스럽고, 조커를 연기하는 것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망령). 하지만 동시에 조커를 연기하는 것은 사랑과 주목을, 그리고 자신을 바보취급 하는 사회를 향한 통쾌한 반항을 가능케한다(유혹). 아서는 결국 그 유혹에 굴복하여 조커가 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자주색 양복을 입고 조커 분장을 한 그는 과연 어디까지 "조커"인 것일까? 엄밀히 말해 우리는 결코 작중 등장하는 아서플렉-조커를 한 가지 모습으로, 한 가지의 자아로 쉽사리 재단할 수 없다. 우리는(관객은) 만화경을 통해 그를 보고 있다. 그는 분열적이고 다층적이므로, 그에 대한 이해나 설명은 필연적으로 다의적이다. 이를테면 아서플렉-조커의 자아는 은밀하게, 혹은 아주 명백하게 착종되어 있다. 이 둘은 무 자르듯이 구분될 수 없다. 일견 아서는 분장과 착장을 통해 이 둘 사이를 분절적으로 넘나드는 듯 보이지만, 내면의 심리의 차원에서 이 둘은 결코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는다. 그가 뮤지컬로 표현되는 몽환 속에서 조커의 모습으로 노래할 때조차 거기에는 분명 아서플렉의 울분과 소망이 강하게 녹아들어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를테면 "아서플렉-조커"에게 만화경적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만화경적이라는 것은 아서플렉-조커의 분열성 혹은 다층성을 가시화한다는 의미이다. 현미경이라는 것은 아서플렉-조커의 내면에 깊게 파고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과 몽환 사이의 넘나듦, 내면적 자기분열, 변호사와 할리퀸 양자에 대한 믿음과 불신의 혼재상황은  (적어도 플렉의 목소리에 대한 인내심을 갖고 있는 관객에게는) 아서플렉-조커라는 인물을 둘러싼 진실들, 그의 본심(사실 그에게 본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것 자체가 물음의 대상이다), 끊임없는 분열적 상황 에서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그가 최후에 내리게 될 선택 등에 관하여 이입하고 반추하게 만든다. 요컨대 <조커2 : 폴리 아 되>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또한 강박적으로 아서플렉의 목소리를 들어보게끔(혹은 상상하게끔) 우리를 안내한다.

 물론, 영화의 종반부에 이를수록 우리는 "아서플렉-조커"가 표면적으로 아서플렉으로 등장하든 조커로 등장하든 간에 언제나 갖고 있는 특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든 그가 절박하리만치 "타인"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아서플렉은 말할 것도 없고, 조커 또한 타인의 주목과 권력의지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서플렉-조커"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카오스 그 자체인 "조커"라기보다는 누구보다도 타인을 욕망하는 연약하고도 자연스러운 인간인 "아서플렉"에 더 가깝다는 것이 매우 유력한 설명일 것이다.

 종합하면, 아서플렉-조커는 결국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투는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전투이다. 그가 (어쨌든 개념적으로는 구분되는) "아서플렉"이 되기를 선택하든 "조커"가 되기를 선택하든 이는 마찬가지이다. 최후의 변론에서 그는 "조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궁극적으로 인간 아서플렉으로 남고자 하지만, 그는 결코 아서플렉이 될 수 없다. 그는 진실로서의 자신, "더 리얼"로서의 아서플렉을 대면할 수 없다. 현실로서의 아서플렉에게는 학대와 상처의 트라우마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학대와 상처의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건강한 자아가 그에게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그는 조커일 수도 없다. 조커는 단지 타인들로부터 요구되는 이미지이자 기호일 뿐(혹은, 단지 공유된 망상 : 폴리 아 되일 뿐) 단 한 순간도 현실의 아서플렉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커를 연기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을 숨막히게하고 옭아매기때문이다. 아서플렉-조커는 아서플렉일수도 없고, 조커일 수도 없다. 그래서 그가 어떤 자아를 "선택"하든, 그것은 그 자신을 패배와 저주의 구렁텅이로 이끈다. 이 영화는 아서플렉-조커의 혼란스러운 분열적 내면, 그 사이의 넘나듦 혹은 그 양자의 착종,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 그 딜레마로부터 도달하는 종착역으로서의 철저한 고갈과 파멸을 아주 음침하고 암울하며 충격적인 영상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3. <조커2>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조커>1편이 후반부에 이르러 은근하게 조커에게 영웅의 아우라를 덧입히면서 "아서플렉"대신 "조커"에 열광하도록 우리를 유도한 반면, <조커2>는 철저하게 "조커"가 아닌 "아서플렉"에게 이입하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혹자는 토드 필립스의 이 같은 선택을 <조커>1편에 대해 가해진 정치적 비판에 대한 수용이자 응답인 것으로 본다. <조커>1편이 소위 "배제된 자들"의 분노를 대리적으로 표출하고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자신(토드 필립스)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소명하기 위해 속편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1편의 진의는 "아서플렉"의 삶에 대한 탐구이자 성찰이었지 폭력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탐닉이 결코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이렇게 본다면, <조커2>에서 조커를 숭앙하는 무리들(할리퀸과 군중들)은 어쩌면 현실의 관객에 대한 유비이고, 토드 필립스는 조커에 열광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너희들 그러지 말라"고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그래서 이는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 일으킨다).

 토드 필립스가 속편에서 보여준 선택에 관한 여러가지 평가가 있을 것이다. 크게는 왜 우리가 "조커"를 보러가서 "아서플렉"의 추레한 동어반복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부정적 반응과, "조커"에 대한 창작적 해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일반적인 안티 히어로물의 장르적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어낸 이 작품의 의의를 주목해야 한다는 긍정적 반응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정적 평가의 양상은 다양할 것이긴 한데, 어쨌든 평단의 다수는 전자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하다. 나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조커2>에 대한 앞서의 장황한 서술들은 이 영화의 작품성을 옹호하기 위한 나름의 논변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그 옹호가 꼭 성공적일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나는 <조커2>가 장르적 창의성, 예측되는 연출 의도에 아주 잘 부합하는 전개의 속도와 형식, 탐미적 과감성, 정치적 타당성 혹은 윤리, 전작과의 적절한 메타적 관계, 현실 사회에 대한 논평적 성격 등을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조커>1편의 예술적 완성도를 뛰어 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1편이 여전히 더 나은 작품이라는 주장이나, <조커2>에서 발견되는 여러 결함들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이러한 주장(의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주장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내 견해의 어떤 부분이 수정보완되기도 하고 <조커> 시리즈가 갖는 예술적 의미가 한층 더 풍성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다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전제를 덧붙이고 싶다. <조커2>의 작품성에 대한 논쟁에 있어 우리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인내심 혹은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조커2>는 핵심적으로 아서 플렉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는 아서플렉의 목소리에 주목해주지 않는 관객들을 향해 마치 울분을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의 작품성이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그 "(아서의)목소리"가 얼마나 적절하게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그 "울분"이 얼마나 타당하고 유효한지에 관한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온당한 평가의 과정은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것,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한 기본적인 경청을 전제로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듣기 싫었다거나, 비참한 패배자일 뿐인 아서 플렉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다거나, 아서의 동어 반복(우리는 그가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린 존재임을 아주 쉽게 망각한다)이 지루하다는식의 논평은 이 영화에 대한 타당한 평가로서 결코 성립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감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평론의 영역에서 주관주의로 침몰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대중적 선호의 영역에서도, 작품성에 대한 평론의 영역에서도 아서플렉은 외면받고 있다. 나는 다만 후자의 영역에서, 이 영화에 대한 외면은 그 근거가 부실하다고 생각한다. <조커2>는 토드 필립스가 전작의 맹점을 치유하기 위해 과감하게 시도하는 예술적 실험으로서 상당한 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에서 관객에게 외면받을지언정, 적어도 평론의 영역에서 아서플렉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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