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 - 기독교적 용서란 정의와 관계를 모두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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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팀 켈러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 2022.11.23.
《위어드》에서는 "서구의, 잘 교육받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주의의" 다섯 가지 특징을 뽑아내 "위어드"라는 인류 문화 중에서 과연 "별종"(위어드)이라 해야 할 서구를 분석했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는 위어드 사회에서는 죄책감을 중시하는 반면 비위어드 사회에서는 대부분 수치심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수치심은 사회적인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 책임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했는데, 보편 종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신들조차도 보편적인 도덕을 지키는 존재가 아닌 명예를 지키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수치심과 명예는 모두 사회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인류 문화의 스펙트럼도 죄책감 사회, 수치심 사회(또는 수치심과 명예 사회), 공포 사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위어드 사회 대부분은 수치심 사회나 공포 사회, 위어드 사회는 죄책감 사회가 됩니다.
《위어드》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보편 종교가 위어드 심리의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이런 보편 종교가 곧 인류 대부분에 퍼졌기 때문에 종교만으로는 위어드 심리가 나타난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보고 집약적 친족 제도를 약화한 서방 기독교의 결혼 가족 강령에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과연 위어드 심리의 한 핵심인 죄책감과, 죄책감에서 이어지는 용서를 어떻게 볼까요?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는 미국 리디머교회의 설립 목사이자 기독교 변증가이며 도시 지역 선교에 힘써 400여 교회를 개척한 인물인 팀 켈러의 개신교 신앙 서적입니다. 세속적인 용서 문화에 맞서는 반문화적인 용서 모델이자, 심지어는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에서조차 온전하게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성경적인" 용서 모델을 가르칩니다. "성경적인"이라는 것은 글쓴이의 개인 견해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 성경적인 용서 모델은 역설적으로 현대의 세속적인,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만연한 "비성경적인" 용서 모델이 무엇인지를 비춰 줍니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겠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
들어가며. 용서 없이는 사랑도, 삶도, 미래도 없다
1 가고 싶지 않은, 그러나 가야 할 길
Part 1. 용서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시간
- 용서 실종 시대
2 용서의 퇴조
: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편한 진리
3 용서의 역사
: ‘타인을 존중하는 윤리’의 시작, 기독교 신앙
4 용서의 원천
: 성경, ‘용서의 원리와 실제’가 살아 숨 쉬는 교본
Part 2. 용서를 이해하다
- 용서, 왜 해야 하는가
5 사랑과 진노의 하나님
: 거룩하고 정의로운 분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6 정의와 사랑, 명예와 학대
: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의와 사랑이 입 맞추다
7 용서의 기초
: 궁극적 목적, 죄를 바로잡아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Part 3. 진정한 용서를 시작하다
- 용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8 우리에게 필요한 용서
: 뿌리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 단 하나의 해결책
9 하나님께 받는 용서
: 자신을 속이는 가짜 회개, 아무 능력이 없다
10 우리가 베푸는 용서
: 용서, 감정 이전에 훈련이라서
11 용서를 넘어 화해로
: 나 대신 복수당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나오며. 은혜로 받은 선물의 위력
감사의 말
부록 1. 용서의 원리
부록 2. 하나님의 용서에 관한 성경 말씀
부록 3. 용서를 실천하려면
부록 4. 화해를 실천하려면
주
1장에서는 1만 달란트 빚진 종 비유를 분석해, 기독교적 용서는 수직적 차원(하나님이 베푸신 용서), 수평적 차원(가해자가 피해자의 용서를 수용), 내면적 차원(피해자가 마음으로 용서) 세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은 전체 책의 전제가 됩니다.
Part 1에서는 현대 사회와 기독교에서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부분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세속적인, 또는 현대 교회에 만연한 용서 모델을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용서가 왜 퇴조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속 사회에서는 용서를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값싼 은혜: 무조건 용서해라.
인색한 은혜: 거래적으로 용서해라.
은혜 없음: 용서하지 마라
이런 관점은 개인의 내면에 치우친 심리치료 문화와 서구에 새롭게 나타난 "수치와 명예의 문화"에서 비롯합니다. 심리치료에서는 피해자의 치유를 목적으로 무조건 용서하도록 하거나 피해자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아예 거부됩니다. 수치와 명예의 문화에서는 용서는 명예와 덕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고대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와 유사한데, 새롭게 나타난 심리치료 문화와 결합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받기 쉬운 하위 계층이 더 명예롭고 덕이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점만 반대일 뿐입니다.
《위어드》에서 지적한 대로 고대 사회 대부분은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돌아가며, 이런 문화에서는 용서가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예수께서 용서를 가르쳤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에서 용서가 미덕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힘을 숭상한 서구 국가들은 끝끝내 수치와 명예의 문화를 온전히 버리지 못했고 그 흔적이 십자군 전쟁이나 결투 문화 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속 사회의 두 가지 용서 모델은 기독교적으로는 수직적 차원이 결여된 온전하지 못한 용서며, 심지어 이런 용서가 기독교 문화라는 서구에서조차 만연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이 용서를 덕이 아니라 오히려 악으로 보고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Part 2에서는 기독교적 용서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고대 사회를 지배했고 중세 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현대 사회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수치와 명예의 문화에 비추어 보면 기독교는 명백히 반문화적이고 기독교적인 용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용서는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되며, 가해자를 견책하면서 또한 사랑해야 합니다.
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에게 성폭행을 당한 체조선수 레이첼 덴홀랜더는 교회에서 무조건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권고를 받은 후 기독교적 정의와 용서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는 앞서 보여준 교회의 용서는 학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며 하나님께서는 가해자에게 벌을 내리시거나 아니면 친히 대가를 치르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덴홀랜더는 나사르에게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죄책감에 무겁게 짓눌리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참으로 용서받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용서를 베풀지만 당신에게는 내 용서보다 그분의 용서가 훨씬 더 필요하니까요.”
더 나아가서, 정의와 용서가 같이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Part 3은 실제로 용서를 하는 방법을 살펴봅니다. 수치와 명예의 문화에서 용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기쁨을 받았기에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죄에 잘못 반응하는 것으로는 책임 회피, 자기 연민, 자학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그 값을 받아내는 행위입니다. 단 그 값을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대신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가해자가 충분히 회개한 이후의 일이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은 "회복적 정의"와 많이 겹칠 수도 있습니다. 서두에 제시하는 데즈먼드 투투는 회복적 정의를 추구한 것이라고 하고, 회복적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많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회복적 정의는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적 용서를 탐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용서란 곧 회복적 정의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겠지만, 회복적 정의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과연 기독교적인 용서를 실천하는가? 복음을 무조건적인 값싼 은혜로 바꿔버리듯 용서 역시 값싼 은혜로 바꿔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는 용서는 정의와 화해를 동반해야 한다는 글쓴이의 주장과, 그리고 자신이 연구한 바를 법정에서 그대로 실천한 레이첼 덴홀랜더의 발언은 특히 자신이 목양하는 그리스도인을 착취한 목회자를 값싼 처벌만 받고 바로 목회로 돌려보내는 몹쓸 관행에 경종을 울립니다.
《위어드》와 연관해서 이 책을 짚어보면, 과연 서구 사회는 수치심 대신 죄책감에 기반을 둔 사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서구에 니체나 마르크스같이 죄책감은 현재의 사회 구조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부과한 쓸데없는 것이었다고 지적한 사상가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서구 사회는 옛날에는 어느 정도 죄책감에 기반을 둔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화 구조적으로 죄책감과 대립하는 관계로 존재하는 수치심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죄책감을 없애려고 한 결과, 수치심에 기반을 둔 문화가 세를 얻은 것 같습니다. 거래적 용서를 기독교적 용서라고 이해한 마사 너스바움같이 수치심 대신 죄책감을 강조하는 현대 사상가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서구 사회가 다시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돌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위어드 문화에서 비롯한 죄책감 문화를 유지할 것인지도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용서에 다시 초점을 맞추면,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변명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명은 죄의 심각함을 흐리는 행위인데,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상대방의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나쁜 것인지 서로 올바르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명을 받아줘서는 안 됩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가해자가 자신이 받는 용서의 가치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용서해야 하며, 그 용서는 현대 세속 사회나 심지어 교회에서 흔히 행하고 있는 잘못된 용서와도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사랑의 실천인 용서를 어떻게 행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런 기독교적인 용서에 비추어 보건대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용서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어쩌면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런 용도로라면 그냥 회복적 정의를 다루는 비기독교 책을 읽는 게 더 낫겠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