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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어느 의사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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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4 회 작성일 24-09-23 22: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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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현직 의사입니다.
이번 의대 증원 사태와 관련해서는 너무 날 선 의견이 많이 오가고 있고 제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저는 임상 의사일 뿐이라 여왕의 심복님처럼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댓글도 단 적이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을 계기로 의사 전반에 대한 인식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1. 우선 저는 의대 증원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임을 밝힙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제게 무슨 정책적 효과에 대한 확신이나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처음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의 주요 논거 중 하나가 의대 증원으로 의료가 붕괴한다는 것이었는데, 의료계의 투쟁 노선이 역설적으로 더 빨리 의료 붕괴를 가져올 것임이 실시간으로 체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료 붕괴가 걱정이라면 일단은 현장을 지키며 환자를 돌보고 국민과도 신뢰를 쌓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국민과의 신뢰를 쌓았다면 정책 진행 후 나중에 정말로 의료 붕괴의 조짐이 보였을 때 국민적 합의를 통해 수습해서 지금보다는 덜 붕괴한 의료 체계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하고 옹호하는 의사들이 소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슬프지만 일부의 일탈이라기보다는 그 반대가 현재 의료계의 현실에 가깝다고 보고, 더 길게 변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러나 일부 의사 선생님들은 지금도 소신에 따라 환자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이곳에 올라온 글에서도 지금 일하는 의사들이 사실은 꿀 빠는 기회주의자들일 수 있다는 식의 댓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블랙리스트에 박제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지금 일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큽니다. 의사들은 주변 인간관계가 대부분 의사로 이루어져 있고 평생을 의사들에 둘러싸여 일해야 해서 이렇게 주변에서 욕을 먹는 것은 다른 직종보다 타격이 큽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굳이 욕을 먹게 될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본분에 대한 소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이번 추석 연휴 중 자원해서 당직 근무를 늘렸고, 연휴가 끝났을 때 다행히 모두가 우려했던 정도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데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4. 그런데도 왜 뉴스에서 보이는 의사들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일까요?

4-1. 우선 의협과 관련해서는 많은 의사의 무관심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협은 모든 의사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단체이지만 투표권은 회비를 낸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의사는 3년마다 현재 어디서 근무하고 있는지 현황을 신고할 의무가 있는데 의협 회비를 내면 온라인으로 편하게 신고를 할 수 있고 회비를 내지 않으면 우편으로 신고서를 보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의대를 갓 졸업해서 뭘 모를 때 딱 한 번 회비를 냈었고 이후로는 회비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위 2번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의사에게 의협 투표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의협의 입장은 강경 투쟁 노선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현재 의협의 경우 적극적으로 회비를 내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대표되고 있고 그러다 보니 단순한 강경론을 넘어 매우 극단적인 의견이 분출되기 훨씬 쉬운 상황이라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점은 의협뿐 아니라 각종 의사회도 대동소이합니다.

4-2. 주류 의사 사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의사에 대한 보호가 부족합니다.
몇 년 전 의대 증원 사태 때 의대생들이 국시 실기 응시를 거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423명의 용기 있는 학생들은 소신껏 실기 시험에 응시했었습니다. 사실 이 당시의 국시 응시는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국시 실기는 소위 선발대라고 하여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먼저 보고 와서 시험 문제를 알려주면 나중에 보는 학생들은 좀 더 편하게 시험을 치는 것이 공공연히 일어나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수만 시험을 보러 가게 되면서 그와 같은 일이 불가능해졌고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합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제 주변에 한정된 얘기입니다만 당시에 실기 거부했던 학생 중에는 의대 증원 문제보다도 자기는 선발대 없이 실기를 붙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실기 거부에 동참했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추가 시험 기회가 부여되었고, 이렇게 선실기와 후실기 응시자가 같이 인턴으로 병원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보건복지부의 모 관계자분께서는 뉴스 인터뷰에서 선실기자에 대해서는 인턴 우선 선발 기회를 주었고 그것이면 그들에 대한 배려는 충분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병원 근무 중 선실기자에 대한 불이익이 만연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이었는데도 정부 정책에 협조한 이들을 적극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립서비스마저 해주지 않는 모습에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청원도 올라왔었지만 별다른 대책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요.

제가 수련받았던 병원의 경우 인턴은 선배 인턴의 사번을 물려받는 구조였습니다. 예를 들어 A001부터 A100까지의 번호가 인턴들에게 부여된다면 1년이 지나 이들이 전공의가 되면 B001로 시작하는 번호를 새로 받습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인턴이 A001부터의 번호를 재사용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도 관행적으로 선실기로 우선 선발된 사람들부터 번호를 부여했었고 그러다 보니 인턴 성적을 주는 레지던트들이 누가 선실기인지 대충 파악이 가능했었습니다. 앞쪽 30번 정도 안에 들면 거의 확실한 수준이었지요. 제 주변 몇 명에 국한된 일이기는 하지만 제가 아는 선실기 응시자는 우연인지 모두 인턴 성적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참고로 인턴 성적은 시험을 봐서 매기는 게 아니라 매달 파견지마다 담당 레지던트가 일하는 것을 보고 주관적으로 주는 점수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불이익을 주려는 시도에 매우 취약합니다.

이번 블랙리스트 파동에서도 관련자에 대한 비난은 많이 보이지만 정작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구제책 마련이나 앞으로의 보호 조치 강구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이 보이지 않는 데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일부 의사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정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이런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지난번 선실기 응시자들에 대해 확실한 보호를 해주었다면 이번에 사직하는 전공의들의 수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일을 직접 겪었던 선실기 응시자라면 이번에 사직 전공의들에게 동참해 함께 사직했다 하더라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는 한편 이번에 사직한 전공의들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가 결국 한발씩 계속 양보하는 모양새를 보면 앞으로도 의사 단체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는 쪽이 손해라는 시그널을 주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5. 의대 입시 제도 개편이 위와 같은 문제에 어느 정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의료 정책에 대한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블랙리스트로 불거진 의료계의 문제는 의사 사회의 지나친 폐쇄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바 의사 선발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번 의대 증원 시 공공의대 설립이 정책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선발 방식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로 여론이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설령 선발의 공정성이 좀 저해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의대를 설립하고 기존 의대의 선발 방식도 예과 일변도가 아니라 이전의 편입 제도 부활 등으로 다변화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처럼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들어와서 동아리 생활도 다른 단과대학과 별도로 의대 안에서만 하고, 군대도 나중에 군의관으로만 다녀오는 체제에서는 사회의 다양한 면을 보고 넓은 시야를 갖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다른 의견을 가진다 해도 선배들에 저항한다는 것이 경험도 적고 어린 나이에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부 강경론자들의 목소리만 확대 재생산될 뿐이지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몇천 명을 새로 뽑는다 해도 지금 같은 체제에서는 선배들에 동조해 같이 휴학하고 국시를 거부하기나 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입시 제도의 불공정성에 대한 우려보다는 의사 집단의 사회와 동떨어진 인식이 더 큰 폐단이 된 시점 같습니다. 기왕 정원을 늘릴 것이라면 기존 의사들과 좀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6. 의료의 공급 유발 수요에 대하여.
블랙리스트와 직접적 관련은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이왕 의대 증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김에 이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는 학술적으로 공급이 실제로 얼마나 수요를 유발하는지 같은 것은 모릅니다. 다만, 의사 구인 공고를 보면 수액 처방이나 CT, MRI 촬영에 대해 건당 인센티브 제공 같은 조건이 포함되어 있는 공고들이 가끔 보입니다. 개인 매출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넘기면 그 이상 수액 판매분의 수익은 50%를 주겠다거나 응급실 내원 환자 한 명을 입원시킬 때마다 3만원을 주겠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실제로 그런 병원에서 일해본 적은 없어서 정확한 실상은 모릅니다만 공고가 올라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이런 공고는 정말로 극히 일부로 대부분 병원 공고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의료 수요에 대한 글에서 제가 알기로는 다른 의사 회원분들이 이런 내용을 언급하신 적은 없는데, 아마도 의료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기는 경우를 우려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언급했다가 실제로 필요한 CT 촬영이나 입원을 거부하는 분이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우리나라 의료 제도가 큰 틀에서 바뀔 수 있는 시점이니만큼 이런 어두운 면도 모두 공개가 되어야 더 건전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언급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위와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병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의학적 처치를 권유받으셨다면 인센티브를 의심해서 따르지 않기보다는 의료진의 권고에 따르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의사들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이는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자영업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면허로 보호된다고는 해도 결국 망하면 자기 책임이고 수익이 나는 만큼 가져가는 구조인 상황에서 이윤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무조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경쟁이 유도되고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하게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요. 다만, 저는 의업의 생리와 자본주의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영국처럼 의사가 공무원인 것이 의업의 본질과는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전문의를 빨리 볼 수 없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철저히 의학적 필요에 따라서만 소신껏 진료하는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이 제 개인적인 선호 사항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우리 의료 제도 전반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시점에서 이런 근원적인 부분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려 봅니다.

7. 이 글을 마지막으로 무거운 주제의 글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원래는 가벼운 게임 관련 글 같은 것이 쓰고 싶어져 가입했습니다만 정작 매번 무거운 글만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의사라면 그 자체만으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몇 번 자게에 글을 남겼지만 이렇게 첨예한 주제에 대해서까지 신분을 밝히고 주장을 펼칠 정도는 못 됩니다. 아무래도 관련된 내용을 많이 말하다 보면 제 신상이 특정될 수 있어서 앞으로는 의료에 대한 글은 삼가려 하고, 이 글에 대한 피드백도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할 것 같아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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