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31. 남을 영(贏)에서 파생된 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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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니벌 라(蠃)에서 파생된 한자들을 다룰 때 같이 언급하고도 정작 풀이에서는 빼놓은 한자가 있다. 바로 가득찰 영(嬴)이다. 이 한자는 蠃의 원형 蠃-虫에 계집 녀(女)가 결합한 한자로, 중국 고대의 성씨인 8성 중 하나기 때문에 금문에 많이 쓰이고 있다.
《설문해자》에서는 이 한자를 女에서 뜻을 가져오고 야윌 리(羸)의 생략형에서 소리를 가져왔다고 풀이한다. 후대의 주석에서는 羸이 아니라 蠃-虫에서 소리를 가져왔다고 바로잡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긍정하기에는 嬴과 蠃이 소리가 너무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蠃-虫를 공유하며 소리가 "영"인 한자들 중 어문회 급수 시험에서 출제하는 한자는 세 가지가 있다. 바다 영(瀛), 가득찰 영(嬴), 남을 영(贏). 이 중 瀛은 嬴에서 파생된 한자이고, 嬴과 贏을 비교하면 女가 들어가는 嬴보다는 조개 패(貝)가 들어가는 贏이 뜻과 구성 요소 사이의 관계가 더 가까우므로 贏을 기준으로 삼겠다. 嬴은 성씨 외의 뜻으로는 贏과 상통한다.
왼쪽부터 남을 영(贏)의 금문, 전국시대 초나라 문자, 설문해자 소전. 출처: 小學堂
贏은 嬴보다는 덜 쓰였지만 주나라 금문에서 이미 등장하는데, 사람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글자의 뜻은 "이익을 남기다"이며, "남다", "너그럽다", "대접하다", "메다", "이기다"(이 경우 지다라는 뜻의 상대자는 輸) 등으로 쓰인다. "메다"의 뜻은 나중에 손 수(手)가 덧붙어서 멜 영(攍)으로 파생되었다.
贏(남을 영, 영축(盈縮/贏縮), 수영(輸贏) 등. 어문회 특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贏+女(계집 녀) = 嬴(가득찰 영): 영진(嬴秦), 장영(長嬴) 등. 어문회 특급
贏+竹(대 죽) = 籯(광주리 영): 영금(籯金) 등. 급수 외 한자
嬴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嬴+手(손 수) = 攍(멜 영): 급수 외 한자
嬴+水(물 수) = 瀛(바다 영): 영주(瀛州), 동영(東瀛) 등. 어문회 준특급
嬴+石(돌 석) = 䃷(익힐 영): 급수 외 한자
嬴+肉(고기 육) = 䑉(똥 영): 급수 외 한자
嬴+艸(풀 초) = 䕦(국화 영): 급수 외 한자
贏에서 파생된 한자들.
대부분의 한자가 현대에 쓰이지 않는 벽자이지만, 그럼에도 贏·嬴에서 소리를 가져온 한자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어는 티베트어·버마어 등과 함께 중국티베트어족을 이루며, 이 어족은 중국어파와 티베트버마어파로 나뉜다. 따라서 중국어파와 티베트버마어파에는 공통의 조상 단어들이 존재하는데, 티베트버마어파에서 "가득함"을 뜻하는 어근인 *(p/b)liŋ이 한자 贏·찰 영(盈)·아이밸 잉(孕)과 유관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중국티베트버마어파에는 평평함을 뜻하는 *(p/b)lyaŋ, 한자로는 평평할 평(平), 그리고 곧음을 뜻하는 *(p/b)lyaŋ, 한자로는 빼어날 정(挺) 등이 (p/b)liŋ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티베트버마어족에 속하는 라후어족을 연구한 제임스 마티소프는 곧음은 1차원의 완전함, 평평함은 2차원의 완전함, 가득함은 3차원의 완전함을 뜻하기 때문에 서로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소리가 "영"인 한자에 "가득하다, 남다"의 뜻을 부여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贏의 음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회의자다. 貝와 蠃-虫가 합쳐져서 "가득하다, 남다"의 뜻이 되었기에 소리가 "영"이 된 것이다.
형성자다. 貝가 뜻을 나타내고 蠃-虫가 소리를 나타낸다.
1로 보면 조개·재물을 나타내는 貝와 신수 또는 나나니벌 또는 소라 또는 노새를 뜻하는 蠃-虫가 어떻게 가득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답해야 하고, 2로 보면 음이 "라"인 蠃-虫에서 어떻게 "영"이란 음이 나왔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2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蠃-虫에 처음부터 "라" 외에도 "영"이라는 음이 있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대개 서로 아예 다른 음이 있는 2개의 한자는 뜻도 2개로 해석해야 하는데, 어떤 동물을 본뜬 상형문자임이 분명한 蠃-虫가 서로 다른 두 동물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1이 아닐까 한다. 웹 사이트 상형자전에서는 蠃-虫를 일종의 배로 보고, 배를 재물로 가득 채워 넉넉하게 남는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와 비슷하게, 蠃-虫를 소라로 보고, 소라가 껍데기를 살로 가득 채우듯이 재물을 넉넉하게 채워 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서 나아가, 贏이나 嬴을 성부로 삼는 한자들은 가득히 채워 남거나 완전히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攍은 手(손 수)가 뜻을 나타내고 嬴(가득찰 영)이 소리를 나타내며, 가득히 찬 것을 손으로 메고 가는 것을 뜻한다.
瀛은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嬴(가득찰 영)이 소리를 나타내며, 물이 가득히 찬 강이나 바다를 뜻한다.
䃷은 石(돌 석)이 뜻을 나타내고 嬴(가득찰 영)이 소리를 나타내며, 돌로 완전하게 될 때까지 갈며 익히는 것을 뜻한다.
籯은 竹(대 죽)이 뜻을 나타내고 贏(남을 영)이 소리를 나타내며, 대나무로 만든 채우는 물건인 광주리를 뜻한다.
䑉은 肉(고기 육)이 뜻을 나타내고 嬴(가득찰 영)이 소리를 나타내며, 사람의 뱃속을 가득 채우는 똥…… 이러면 사람을 무슨 똥 만드는 기계 취급하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한 김성모 작 《스터프 166km》의 대사, “네놈은 하루하루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이지!”가 생각난다.
이상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贏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贏(남을 영)은 소라, 또는 짐승 모양의 장식이 된 배인 蠃-虫와 재물을 뜻하는 貝가 결합해 소라가 껍데기를 채우듯, 또는 배에 재물을 채우는 데에서 가득 차다, 남다를 뜻한다.
贏에서 嬴(가득찰 영)·籯(광주리 영)이 파생되었고, 嬴에서 攍(멜 영)·瀛(바다 영)·䃷(익힐 영)·䑉(똥 영)·䕦(국화 영)이 파생되었다.
贏·嬴은 파생된 글자들에 가득 채움·남음·완전하게 함의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