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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의 황금기 90년대 가요톱10 1위곡 열전(1994년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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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551 회 작성일 24-07-05 06: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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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범 - "난 널 사랑해" 1994년 5월 1주~5월 2주 (2주연속)
1988년 가수로 데뷔한 신효범은 90년대에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이라 불리기도 했던 가창력 뛰어난 여자 가수였습니다. 1989년 1집 정규앨범을 냈는데 역시나 대표곡은 1993년 11월에 나온 4집앨범에 수록된 "난 널 사랑해"인듯 하네요. 저는 그 당시에 여자 가수의 발라드를 듣기엔 너무 시골 촌놈이라 가요톱10 1위를 했던 이 곡 외에는 솔직히 기억나는 노래가 없어요. 호홋. 
아무튼 신효범은 2001년 8집 앨범까지 내면서 활동을 하였다가 2006년 다시 9집을 낼 때까지 공백이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90년대는 미국에서도 디바로 불리던 여자 가수들의 화려한 전성기가 펼쳐졌던듯 싶습니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이 3대 디바로 평가받았고, 저 개인적으로는 엔야를 좋아했답니다. 엔야의 "Caribbean Blue", 어린 마음에 아련한 여신의 감성을 일깨워준 명곡이죠. 지금 들어도 설레네요. ()




이상우 - "비창" 1994년 5월 3주~6월 2주 (4주연속)
1988년 강변가요제로 데뷔한 이상우는 곱상한 외모에 대학생 같은 이미지를 가진 솔로 가수입니다. 이상우는  1988년 "슬픈 그림같은 사랑"이라는 발라드곡을 불렀고 인기를 얻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강변가요제에서 당시 "담다디"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가수 이상은과 경쟁했는데요, 이상은이 워낙 강렬한 이미지였던터라 이상우는 상대적으로 가려졌었습니다. 사실 이후로 둘 다 시대를 풍미하는 명가수의 길을 걸었죠. 
이상우는 1989년 1집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때 히트곡이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입니다. 지금도 아련히 기억나는 분들 계실듯요. 당시엔 범생이같은 뿔테 안경을 쓰고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메고 나와 정직한 가창력으로 발라드곡을 부르는 것이 꽤나 정석적인 공연 모습이었던듯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요계에 아직 서태지와 아이들이 몰고온 폭풍우가 있기 전이기도 하니. 
1990년 이상우는 드디어 2집을 발표하였는데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은 당시 골든컵은 물론 대단한 인기를 끌며 그의 대표곡처럼 남아 있습니다. 다음해인 1991년에는 3집 타이틀곡 "하룻밤의 꿈"으로 두번째 골든컵을 들었습니다. 이 곡도 참 좋아요. 그가 진정한 가수임을 알 수 있는 곡입니다. 그리고 1993년 4집에서 이제 "비창"으로 다시 1위를 석권했으나, 아쉽게도 세번째 골든컵에는 간발의 차이로 도달하지 못했었네요. 도달했다면 김건모랑 같은 급의 기록이 되었을텐데요. 
"비창"은 지금 감성으로 들어도 소맥(?)을 부르는 씁쓸한 맛이 있네요. 가창력만으로 승부하는 발라드 가수들이 얼마든지 활동하고 있던 당시가 참 그립습니다. 





마로니에 - "칵테일 사랑" 1994년 6월 3주~7월 3주 (5주연속)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 보고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마로니에는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을 "칵테일 사랑"이 1994년 3집 앨범의 수록곡이지만 원래는 1989년 그때그때 객원가수를 기용하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기획자 김선민이 결성했다고 합니다. 마로니에는 대학로에 있는 그 마로니에 공원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 맞구요 당시에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버스킹을 하던 뮤지션들이 많이 모였었다고 하네요. 통기타 싱어송라이터 뭐 그런거잖아요. 
칵테일 사랑은 기획자인 김선민이 작사, 작곡하였는데 사실 이 분은 마로니에의 상당수 곡(절반 이상)을 만들었기에 이 곡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앞서 나왔었던 김건모의 "핑계"와 같이 이 곡도 레게 리듬을 잘 살리고 있고 가사를 보면 아직 90년대 초반인데 꽤나 서정적인 것 같아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라든가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라든가... 그냐말로 고농도의 감성이 농축되어 있죠. 가히 밀리언 셀러를 기록할만한 곡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당시 들을 때는 곡 후반부에서 내뿜어지는 고음 파트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네요.(3:21 시점부터) 뭐 그건 그렇고 다음 곡으로 가기 전에 아래 영상이나 보고 가시죠. 영상의 주인공은 4집에서 멤버로 참여한 김민경과 김지영이라고 합니다. 이 분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할까 모르겠지만 그 미모는... 여전하시기를. (안구 정화 너무 감사합니다.)





투투 - "일과 이분의 일" 1994년 7월 4주~8월 4주 (5주연속)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니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4인조 혼성그룹(3+1) 투투는 1994년 데뷔하였는데요 정확히는 황혜영은 객원 멤버였다고 합니다. 투투는 "나이가 22살 동갑네기들"(73년생들) 이어서라고 하네요. 멤버들인 김지훈, 오지훈, 유현재는 어릴 적 중학생 때부터 음악적인 끼를 발휘하면서 밴드 활동을 해왔었고, 이 친구들은 1993년부터 준비해서 1994년에 3인조 프로젝트 그룹 투투를 결성하고 앨범을 준비하였다고 해요. 다만 당시 데뷔앨범의 타이틀 곡은 "일과 이분의 일"이 아니라 다른 곡이었는데 기획사 사장님이 "별도로 만든 곡"인 일과 이분의 일을 들어보더니 뜬다고 확신하면서 타이틀곡을 바꿨다고. 
객원 멤버로 영입된 황혜영은 다른 곡들과 무관히 이 곡 하나에서만 퍼포먼스와 일부 파트의 노래를 위해서 따로 기용되었었다고 해요. 사실 3인조 남성밴드로서 투투에서는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한 오지훈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만 정작 "일과 이분의 일"이 방송을 타고 히트하면서부터는 객원이었던 황혜영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고 비주얼 담당인 리드보컬 김지훈 또한 인기였죠. 참고로 황혜영의 저 단발머리는 가발이 맞습니다요. 지금보니 뭔가...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언년이 느낌이네요. 음.
진짜 될 놈은 된다고 투투의 데뷔곡이었던 "일과 이분의 일"은 1994년 6월부터 7월에 걸쳐 가요톱10을 질주하여 내친김에 골든컵까지 먹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1994년의 여름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이 두 곡이 양분해 버린 셈이랄까요. 
그러나 투투 1기는 1994년 말과 1995년에 멤버들(유현재, 오지훈)의 군 입대로 신속하게 해체되어 버렸답니다. 그리고... 리드보컬 김지훈은 투투 해체 이후 솔로 데뷔, 그룹 활동(듀크)을 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고 시트콤(논스톱)에도 출연하는 등 예능 활동도 했습니다만 2000년에 전반적으로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고 이혼을 경험하거나 약물 문제도 터졌다고 해요. 마침내 2013년 우울증 치료를 받아오다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강력한 외모와 가창력을 바탕으로 잘 풀렸다면 참 좋았을텐데라며 지금도 김지훈을 기억하며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부활 - "사랑할수록" 1994년 8월 5주~9월 1주 (2주연속)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너를 사랑하면 할수록멀리 떠나가도록스치듯 시간의 흐름 속에
뜨거운 여름이 가고 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가을을 맞이하면서 차분해진 걸까요. (사실 이때즘엔 지금과 다르게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이 실제로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가을 타냐?"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1985년에 결성되어 아직도 현역인 록밴드 부활의 정규 3집 앨범의 대중성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던 타이틀 곡 "사랑할수록" 입니다. 부활 3집의 보컬은 김재기 (작사 작곡은 김태원)였는데 불행히도 1993년 11월 앨범 발매 전인 8월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4년에 이 곡 "사랑할수록"이 히트를 하면서는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가 보컬로 활동하였다고 해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구요. (부활 통산 최대 판매 앨범이기도 하고 1994년 김건모 2집 다음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사실 1993년 말에 발매한 앨범이었는데 한참을 잠잠하다 다음해 8월에야 터진 것이니 역주행에 가깝겠네요. 
음... 개인적으로 이 노래에 관련된 웃픈 기억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중3이었습니다만, 우리 반에 학교 일진 짱이 있었던터라 (참고로 1년 꿇어서 애들보다 1살 위) 쉬는 시간만 되면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이럼서 주구장창 이 노래를 열창하다가 삑사리가 나면 짜증 나는 표정으로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가래를 모아다 교실 바닥에다 톽 뱉으면서 욕을 찰지게 치며 교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던 일이 지금도 사진의 한 장면처럼 남아 있네요. 지금은 잘 지내나 모르겠습니다. 



김원준 - "너 없는 동안" 1994년 9월 2주~10월 2주 (5주연속)
잘 빠진 몸매와 외모너보다 더 잘난여자찾길 원한건 사실이야난 하지만 욕심일뿐 내주제를 몰랐던건단지 나의 착각이었어야이야히야이야
훤칠한 외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김원준은 1992년 1집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로 데뷔하였고 데뷔곡이 바로 히트한 이후에 "언제나" "너없는 동안" "Show" 등 쟁쟁한 히트곡들을 성공시켰죠. (SHOW 끝은 없는 거야 지금 순간만 있는 거야~~!)
김원준은 서울예대에 진학하여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992년 제일기획에서 진행한 오디션에서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면서 가수 데뷔를 하였습니다. 이 때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가 자작곡인 "모두 잠든 후에"였고 데뷔 후 바로 히트를 해버렸으니 음악적 재능은 확실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해요. "모두 잠은 후에"는 가요톱10 4주연속 1위, 여러분의 인기가요 7주 1위 등 대박을 쳤구요. 당시를 생각해보니 그때 김원준의 이미지는 왠지 홍콩 배우 장국영이랑 겹쳐 보이기도 하고 노래가 홍콩 노래 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1993년에는 2집 앨범에서 "언제나"를 히트시켰고, 1994년 3집에서 "너 없는 동안"이 5주 연속 1위로 가요톱10 골든컵을 받았으니 단순히 댄스 아이돌로만 취급해서는 안되겠죠. 제대로된 가수이자 X세대를 필두로 하여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준 뮤지션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저 라이브 영상을 보면 객석에서 들려오는 X세대 빠순이들 특유의 떼창과 비명소리가 그 시절의 전형적인 펜덤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다 이마에 주름간 아줌마들
아무튼 김원준은 1992년 데뷔이후 1996년 5집 "쇼"까지 시대를 풍미하면서 패션, 댄스, CF, 브로마이드(...), 책받침 등 아이돌 팬덤이 어떤 모습인지 일찌감치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외모나 팬덤에 가려져 있는 경향이 크지만 약 300여곡의 자작곡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데뷔곡부터 자작곡이었으니) 참고가 됩니다.  이제 50대인데 동안 외모는 또 무엇... 욕심이 과하네요.



더 블루 - "그대와 함께" 1994년 10월 3주~11월 1주 (3주연속)
지난 오랜 시간동안한번도 말은 안했지만그댈 위한 내 마음은 그대로인걸
처음 만난 순간부터나의 마지막 그날까지그대만이 나의 마음 속에 언제까지나
Oh Oh 언제까지나
김원준만큼이나 90년대 초반 시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손지창, 김민종의 남성 듀오 더 블루입니다. 90년대스러운 훈남 컨셉은 지금봐도 상큼하군요. 연기자, 배우로 활동해 온 이들은 1992년 더 블루를 결성했습니다. 김민종은 1992년 같은 해에 솔로 1집을 내면서 가수 데뷔 후 더 블루를 12월에 결성해서 듀오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실 더 블루의 첫 곡인 "너만을 느끼며"도 어마어마한 인기였죠. 외모, 키, 가창력, 무대 스킬 등 여러모로 인기요소가 확실했구요. 중학생 때 라디오로 줄창 줄었었네요. 
"너만을 느끼며"는 원래 오리온의 투유 초콜릿의 CF송입니다. 이게 히트하면서 정식데뷔를 한 셈이구요. 후속으로 "그대와 함께"는 KBS 드라마 "느낌"의 주제가입니다. 재밌죠. 
이후 더블루는 1995년 2집을 냈는데 손지창이 소속사와 재계약을 거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김민종은 잔류) 사실 둘 다 본업(?)이 따로 있었고 듀오 그룹 아니어도 김민종은 만능 엔터테이너로 평가되면서 여러 활동을 해나갔기도 하거든요. 김민종의 경우 1992년 1집을 시작으로 2003년 정규 8집까지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었습니다. 다수의 OST 작업도 해나갔구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뮤지션인듯. 손지창은... 근황으로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니 그냥 다른 사람이 되었네요. 



구본승 - "너 하나만을 위해" 1994년 11월 2주~11월 3주 (2주연속)
지금까지 나 살아온 동안에
내가 나의 전부였어
세상 가운데 내가 서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었던 거야
구본승 기억하시는 분은 의외로 별로 없으려나요. (이런 케이스는 딱 슈가맨에 출연해 주면 될 건데요.) 일단 구본승은 1994년 1집 앨범 타이틀곡인 "너 하나만을 위해"라 데뷔해서 이 곡으로 1994년 겨울 1위를 먹으면서 가수 활동을 시작해 총 4개의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이외에 종합병원으로 드라마 활동도 했었지요. (스토리는 전혀 기억 안납니다.)
구본승 관련해서 기억난는 건 한창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갑자기 군대를 간 사건이랄까. 박수칠 때 떠나려고 한 건지, 확실히 톱스타가 군대를 가니 박수치는 사람이 많긴 했던가 봅니다. 그나저나 다시 찾아보니 역시나 2015년에 이미 슈가맨에 출연한 이력이 있었네요. 호홋. 
참고라고 한다면 구본승(능성 구씨)는 저랑은 두 항렬 높은 할아버지뻘이라는 거랄까요. (저는 교 입니다. 능성 구씨가 본-모-교 로 돌림자가 이어짐) 코미디언 구봉서 이후 오랜만에 구씨 가문에 유명인이 등장해서 기분이 뭔가 뭔가. 



신승훈 - "그후로 오랫동안" 1994년 11월 4주~12월 3주 (5주연속)
하늘이여 나를 도와줘 그렇게 울고 있지 말고내 님이 있는 곳 너는 쉽게 알 수 있잖아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우연일지라도 너를 믿을게 너의 눈물 맞으며
오랜만에 신승훈이 등장해 주십니다. 발라드의 황제이자 국민가수 신승훈은 1990년 정규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했었죠. 신승훈에 대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김건모만큼이나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을듯 합니다. (그냥 귀찮음)
신승훈의 수상이력에 대해서 잠깐 살펴봤는데 통산 가요 프로그램 1위를 73번을 했으니 정말 밥먹듯이 1위를 했었네요. (91년부터 02년가지 약 12년간 1위를 기록) 
가요톱10에서는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보이지 않는 사랑, 우연히, 그 후로 오랫동안 등 4번 골든컵을 들었고, 아쉽게 4주 1위한 "날 울리지 마"가 한번만 더 1위를 했다면 골든컵 5개로 조용필의 7번에 이어 역대 2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4번은 이선희와 공동 2위) 근데 신승훈의 어마무시한 인기를 알려주는 보다 확실한 기록은 1991년 2집 앨범 타이틀 곡인 "보이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역대 대한민국 음악방송 최다 1위를 기록한 곡이 BTS의 Dynamite (총 32회)이고 그 다음이 이 곡이래요 (총 31회) 발라드곡 중에서는 당연히 최고 기록이고 당연히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였고 골든컵도 기본이고 SBS인기가요에서는 14주 연속 1위로 기네스북(...)에 올랐답니다. 특히 이 2집에는 "보이지 않는 사랑" 외에 "우연히"까지 골든컵을 타면서 한 앨범에서 두 곡을 올리기도 하는 등 발라드 활제의 전성기였습니다.
사랑해선안될게 너무 많아그래서 더욱슬퍼지는 것 같아그중에서 가장 슬픈건날 사랑하지 않는 그대
역시나 정말 명곡입니다.


룰라 - "비밀은 없어" 1994년 12월 4주~1월 4주 (5주연속)
우우 정말이야 이제 그대에게 비밀은 없어 우우 알고있지 사랑한단 말은 안해도

수많은 명곡들을 남기며 뜨거운 여름과 감성 돈는 가을을 지나 신승훈으로 마무리 짓나 했던 1994년의 끝자락은 그냥 끝나지 않았네요. 1994년 12월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혜성처럼 등장해서 1집 앨범으로 골든컵을 타버린 룰라였습니다. 사실 룰라의 활동은 1994년 이후로도 화려하게 이어졌으니 이들의 인기란 아직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고, 뒤돌아보면 1990년대 중반 X세대 가요 팬덤을 등에 업고 한 해 한 해가 업청났던 그 시절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서곡이라고 불러도 될듯 합니다. 이후 룰라, DJ DOC, 쿨,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 유승준, 박진영 등에서 HOT, SES, 핑클 등 1세대 아이돌로 1990년대는 쉼 없이 진화해 갔으니까요. 
꺼무위키(!)를 통해 잠시 룰라의 데뷔 비화를 찾아보니 정말이지 첨서부터 이놈의 그룹은 범상치가 않네요. (이후에 펼쳐질 숱한 기행과 트러블들의 시작점이랄까...) 간단히 언급하자면 첨에 기획사에 스카웃된 이상민이 고영욱의 소개로 신정환을 소개받아 댄스듀오를 만들려다 듀스가 뜨니까 힘들 것 같자 고영욱을 추가해서 3인조로 가려고 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때문에 불안해지니까 다시 여자를 한 명 추가해서 4명으로 가자고 얘기가 되어서 김지현이 추가되었다... 라고 합니다. 
(이하 룰라 관련 여담)
룰라라는 팀명은 레게의 뿌리(Roots of Raggae)를 줄여서 Roo"ra (이 무슨....) 라고 하네요. 이상민 아이디어였다고. 사실 룰라의 데뷔곡은 "100일째 만남"인데요 일명 "디기디 랩"도 당시 유행하던 래게 리듬에 랩을 적당히 섞어서 뭔가 흐름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 패치워크 같은, 지금 들으면 당췌 무슨 곡인지 모를 괴작 필이 물씬 나는 곡이었구요. 이 역시 이상민이 주도했다고 해요. 
이 대목에서 정말 재밌는 사실은 1994년 5월에 룰라가 신인가수 데뷔 코너에 나왔는데 같은 날 방송에는 투투가 "일과 이분의 일"로 출연했다는 사실. 그리고 두 곡은 주지하다시피 당시 유행을 타던 레게 리듬의 곡들이었다는 점. 게다가 두 그룹 다 남3+여1 구도로 편성된 점... 정도일까요? 그러나 막상 그 당시에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일과 이분의 일"이 여름을 달구며 골듭컵을  기염을 토한 반면 룰라의 곡은 그저 묻혀버리고 말았다는 점이구요.(물론 이후에는 룰라의 데뷔곡이 가요톱10 4위까지 올라감) 그러나, 뒤돌아보면 투투는 1995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어 버린 반면 룰라는 그 뒤로 갈수록 역대급 그룹으로 성장해 나갔죠. 아니, 바로 1994년 연말부터 이미 골든컵을 들어버렸으니...
또 한가지 어이없는 사실은 후속타였던 "비밀은 없어"로 제대로 흐름을 탄 룰라였는데 갑자기 멤버 신정환에게 군입대 영장이 나와 군대로 끌려가면서 강원래의 소개로 당시 이태원 등지 나이트에서 춤으로 이름을 날리던 (...) 채리나가 대체 멤버로 긴급 투입된 후 연습도 없이 진출. 참고로 당시에 이상민은 나이트 춤꾼 중 유명한 김송(=강원래의 와이프 + 1994년 김건모의 "핑계"의 시커먼스 백댄서) 영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채리나를 소개받게 된 것. (그리고 강원래는 김송과 웨딩마치)
그리하여... 시간은 1995년으로 갑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동의 90년대 한국 가요계는 더 큰 태풍으로 들어가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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