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광신자가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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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광신자가 되는 방법
-옛날이야기가 되자
<1> 발해를 꿈꾸지 마세요.
“네가 커서 성인이 되면 아마 통일이 되어서 군대에 안 갈 거야.” 막내 삼촌이 전역을 미루고 장기 복무를 결정하면서 내게 한 말이다. 1990년대 초였고, 나는 국민학생이었다.
2004년이 됐다. 통일? 개뿔. 도대체 어른들은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2015년이 됐다. 중학생이 된 교회 제자가 물었다. “우리도 군대에 갈까요?” 나는 삼촌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2024년이 됐고, 어김없이 국방의 의무는 새 세대에게 그물을 던진다. 중학생 때는 1도 관심 없어 했던 군 생활 이야기가 이제는 들린다. 남이 내가 된다. 그래서 묻는다. “쌤 군생활 어땠어요?” 입대는 사건이지만, 군복은 일상이 된다.
<2> 광신자라는 배역
2004년 8월에 입대를 했고, 2년 뒤에 전역을 했다. 각오는 했지만, 각오만으로 다 되진 않는 게 군생활이었다. 그야말로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자대에 간 그 주부터 문제가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전적으로 나의 눈치 없음이 문제였는데,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자대에 간 첫 주 일요일에 교회를 갔다. 예배도 잘 드리고, 초코파이도 받았다.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저녁 예배도 신청했다. 당시 내무반 선임이 성가대를 지휘할 정도로 신실한 분이었는데, 저녁 예배도 있으니 가서 신청하고 나중에 또 보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저녁 종교 행사 집합을 가보니 중대에서 신청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당직부관은 재밌어했고, 당직병의 표정은 썩었으며, 내무반 고참은 다녀와서 보자고 했다. 그날 저녁 예배 때 불렀던 찬양과 들었던 말씀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이 독배를 피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던 기억만 난다.
기도 덕에 무사할 수 있었나? 그럴 리가.
군대란 무엇인가, 군기란 무엇인가,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뼈저리게 만끽하는 시간이 장맛비처럼 나를 때렸다. 놀랍게도 그걸 보면서도 성가대 지휘선임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세상에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는 교훈은 배신 없이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나의 첫인상이 되었고, ‘이등별이 등장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됐으며, 무엇보다 광신자로 낙인찍혔다. 나는 결코 광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닙니다.” 했지만, 중한 건 천한 이등병의 말이 아니라 개념 없는 행동 그 자체였다.
광신자 배역을 맡게 되어 일요일에는 무조건 교회에 가야 했다. 그러니까 폭설이 오거나, 태풍이 오거나 혹은 군 훈련 기간 또는 검열 기간에도 어떻게든 갔다. 또 알코올에는 절대 입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 광신자의 신념이므로 훈련을 마친 뒤에 중대장이 주는 술이나 체육대회 날 선임이 주는 술을 다 거절했다. 물론 그따위 행동을 하면 후폭풍이 매섭게 도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므로, 나는 유혈사태의 중심에서 십자가 코스프레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갈수록 나는 신의 아들이 되는 밈을 누리기 시작한다. 하루는 발칙하게 선임을 제치고 골을 넣은 죄 때문에 군대식 축구 룰에 대한 개념을 훈육받아야 했는데, 불필요한 충성의 매도 동원됐다. 훈계를 마친 선임은 그날 저녁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목을 접질린다. 절뚝이며 내무반에 들어오는 그 인간을 본 다른 선임들이 말했다. “이야, 신의 저주다!”
인간은 우연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인과 관계를 따져 이야기를 만든다. 신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점점 누구보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가능해진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무쪼록 할렐루야.
군대는 시간이 벼슬이다. 아니꼬우면 먼저 가면 된다. 나는 애석하게도 그 새끼들 보단 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후임 중엔 착하게 살기 위해 몸에 글을 새겼던 친구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부대는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의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후임들은 선임들의 눈치가 보인다. 훈련 준비나 검열 대비 등의 일정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나는 나의 고초에 무심했던 성가대 선임놈이 있었기에, 밖에서 교회에 열심이었던 애들을 파악해서 챙겼다. 그렇게 군생활의 몇 안 되는 위안이던 신앙생활을 잘 해 왔는데, 중대장의 호출이 있다. 그러니까,
“네가 억지로 교회 데리고 다닌다고? 소원수리 올라왔으니까 조심해라.”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나 데리고 다녔던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찐’만 챙겼다. 혹여나 후폭풍이 있을까 싶어서 안 해도 되는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까지 해왔다. 그런데 이 무슨?
그러고 보면 가끔 그런 일은 있었다. 교회를 가기 위해 준비를 시키는데,
-동기놈: 야, 이번 주는 철수랑 동수는 빼고 가라. 걔들도 우리랑 축구하고 싶지 교회 가기 싫다더라.
-나: 뭐래? 걔들 목사 아들, 장로 아들이야. 갔다 와서 공차면 되지.
-동기놈: 아, 인원 딸리는데. 야, 축구 작업자 방송 쳐라.
뭐야? 레알이었어?
소원수리 이후 예배 참석 인원은 줄었다. 한 둘이 아니었고, 정말 내가 고참이라서 말을 못한 게 맞았다. 아니, 목사 아들, 장로 아들, 기독교 동아리 장들인데, 그럴 수가 있나?
아무쪼록 나는 광신자가 확실해져서, 의기소침해졌고, 무엇보다 삐져서 더는 종교 활동에 상관하지 않았다. 자주 고장 나던 국방부의 시계도 어쨌든 가긴 간다. 그래서 온다, 내 차례가, 놀랍게도. 그런 어느 날이었다. 만사에 열외를 탈 수 있던 말년의 날에 다른 내무반에서 후임 둘이 찾아와서 말했다. “최병장님 덕분에 눈치 안 보고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니, 진작에 좀 하지.
나는 그 친구들이 입대하기 전에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해줬고, 소원수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알려줬다. 누군가는 군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누군가는 군에서만큼은 신앙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한정된 경험으로 후임들의 마음을 어렵게 한 선임이 맞고, 또 그럼에도 그렇게 했기에 누군가에게는 영적 귀감이 됐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눈치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곧 입대하는 제자에게 해주었다. 잘 들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아! 역시 옛날 사람의 옛날이야기네요.”
아니, 왜 듣고 있었냐?
내가 겪은 고충이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부디.
-옛날이야기가 되자
<1> 발해를 꿈꾸지 마세요.
“네가 커서 성인이 되면 아마 통일이 되어서 군대에 안 갈 거야.” 막내 삼촌이 전역을 미루고 장기 복무를 결정하면서 내게 한 말이다. 1990년대 초였고, 나는 국민학생이었다.
2004년이 됐다. 통일? 개뿔. 도대체 어른들은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2015년이 됐다. 중학생이 된 교회 제자가 물었다. “우리도 군대에 갈까요?” 나는 삼촌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2024년이 됐고, 어김없이 국방의 의무는 새 세대에게 그물을 던진다. 중학생 때는 1도 관심 없어 했던 군 생활 이야기가 이제는 들린다. 남이 내가 된다. 그래서 묻는다. “쌤 군생활 어땠어요?” 입대는 사건이지만, 군복은 일상이 된다.
<2> 광신자라는 배역
2004년 8월에 입대를 했고, 2년 뒤에 전역을 했다. 각오는 했지만, 각오만으로 다 되진 않는 게 군생활이었다. 그야말로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자대에 간 그 주부터 문제가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전적으로 나의 눈치 없음이 문제였는데,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자대에 간 첫 주 일요일에 교회를 갔다. 예배도 잘 드리고, 초코파이도 받았다.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저녁 예배도 신청했다. 당시 내무반 선임이 성가대를 지휘할 정도로 신실한 분이었는데, 저녁 예배도 있으니 가서 신청하고 나중에 또 보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저녁 종교 행사 집합을 가보니 중대에서 신청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당직부관은 재밌어했고, 당직병의 표정은 썩었으며, 내무반 고참은 다녀와서 보자고 했다. 그날 저녁 예배 때 불렀던 찬양과 들었던 말씀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이 독배를 피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던 기억만 난다.
기도 덕에 무사할 수 있었나? 그럴 리가.
군대란 무엇인가, 군기란 무엇인가,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뼈저리게 만끽하는 시간이 장맛비처럼 나를 때렸다. 놀랍게도 그걸 보면서도 성가대 지휘선임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세상에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는 교훈은 배신 없이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나의 첫인상이 되었고, ‘이등별이 등장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됐으며, 무엇보다 광신자로 낙인찍혔다. 나는 결코 광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닙니다.” 했지만, 중한 건 천한 이등병의 말이 아니라 개념 없는 행동 그 자체였다.
광신자 배역을 맡게 되어 일요일에는 무조건 교회에 가야 했다. 그러니까 폭설이 오거나, 태풍이 오거나 혹은 군 훈련 기간 또는 검열 기간에도 어떻게든 갔다. 또 알코올에는 절대 입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 광신자의 신념이므로 훈련을 마친 뒤에 중대장이 주는 술이나 체육대회 날 선임이 주는 술을 다 거절했다. 물론 그따위 행동을 하면 후폭풍이 매섭게 도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므로, 나는 유혈사태의 중심에서 십자가 코스프레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갈수록 나는 신의 아들이 되는 밈을 누리기 시작한다. 하루는 발칙하게 선임을 제치고 골을 넣은 죄 때문에 군대식 축구 룰에 대한 개념을 훈육받아야 했는데, 불필요한 충성의 매도 동원됐다. 훈계를 마친 선임은 그날 저녁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목을 접질린다. 절뚝이며 내무반에 들어오는 그 인간을 본 다른 선임들이 말했다. “이야, 신의 저주다!”
인간은 우연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인과 관계를 따져 이야기를 만든다. 신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점점 누구보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가능해진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무쪼록 할렐루야.
군대는 시간이 벼슬이다. 아니꼬우면 먼저 가면 된다. 나는 애석하게도 그 새끼들 보단 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후임 중엔 착하게 살기 위해 몸에 글을 새겼던 친구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부대는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의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후임들은 선임들의 눈치가 보인다. 훈련 준비나 검열 대비 등의 일정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나는 나의 고초에 무심했던 성가대 선임놈이 있었기에, 밖에서 교회에 열심이었던 애들을 파악해서 챙겼다. 그렇게 군생활의 몇 안 되는 위안이던 신앙생활을 잘 해 왔는데, 중대장의 호출이 있다. 그러니까,
“네가 억지로 교회 데리고 다닌다고? 소원수리 올라왔으니까 조심해라.”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나 데리고 다녔던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찐’만 챙겼다. 혹여나 후폭풍이 있을까 싶어서 안 해도 되는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까지 해왔다. 그런데 이 무슨?
그러고 보면 가끔 그런 일은 있었다. 교회를 가기 위해 준비를 시키는데,
-동기놈: 야, 이번 주는 철수랑 동수는 빼고 가라. 걔들도 우리랑 축구하고 싶지 교회 가기 싫다더라.
-나: 뭐래? 걔들 목사 아들, 장로 아들이야. 갔다 와서 공차면 되지.
-동기놈: 아, 인원 딸리는데. 야, 축구 작업자 방송 쳐라.
뭐야? 레알이었어?
소원수리 이후 예배 참석 인원은 줄었다. 한 둘이 아니었고, 정말 내가 고참이라서 말을 못한 게 맞았다. 아니, 목사 아들, 장로 아들, 기독교 동아리 장들인데, 그럴 수가 있나?
아무쪼록 나는 광신자가 확실해져서, 의기소침해졌고, 무엇보다 삐져서 더는 종교 활동에 상관하지 않았다. 자주 고장 나던 국방부의 시계도 어쨌든 가긴 간다. 그래서 온다, 내 차례가, 놀랍게도. 그런 어느 날이었다. 만사에 열외를 탈 수 있던 말년의 날에 다른 내무반에서 후임 둘이 찾아와서 말했다. “최병장님 덕분에 눈치 안 보고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니, 진작에 좀 하지.
나는 그 친구들이 입대하기 전에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해줬고, 소원수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알려줬다. 누군가는 군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누군가는 군에서만큼은 신앙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한정된 경험으로 후임들의 마음을 어렵게 한 선임이 맞고, 또 그럼에도 그렇게 했기에 누군가에게는 영적 귀감이 됐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눈치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곧 입대하는 제자에게 해주었다. 잘 들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아! 역시 옛날 사람의 옛날이야기네요.”
아니, 왜 듣고 있었냐?
내가 겪은 고충이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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