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 WEHRM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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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딛고 20년 만에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19년 패전한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내 치안과 국경을 방위하는 국가방위군을 10만 명으로 제한했고 전투기, 전차, 방공포, 대전차포, 중포와 화학무기를 보유할 수 없게 했다. 더불어 중화기의 배치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무기 수입 및 생산을 금지했다. 연합군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한정시켜 향후 독일이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베르사유 조약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 독일의 승리를 달성하는 촉진제가 됐다. 독일군은 미래의 잠재적인 침략자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베르사유 조약이 허용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전투력과 장비들을 극대화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군은 조약의 제한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 대한 사후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고, 전역과 전투를 상세하게 연구해 유럽의 저명한 군사 저널에 기고했다. 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작전 수행을 준비하고 검토하기 위해 대규모 워게임에 참가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독일군은 전쟁에 참가했던 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1920년대의 독일군을 창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독일군 참모총장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였다. 독일군에게 강한 공격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독일군에 처음으로 기동화를 도입했으며 기병을 현대화해 기동수단을 할당하고 화력을 보강하는 등 전간기 독일군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2년 후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면서 독일군은 재무장의 길을 걷게 됐다. 국민의 전폭적 지지와 불황을 타개하려는 산업계의 지원으로 급속도로 군사 확장을 시작한 독일은 징집제를 부활하고 전술, 전략 등 군사 교리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독일은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등 미래의 적들 보다 몇 년 앞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독일군보다 준비가 덜 된 인접국들이 준비를 끝내고 독일의 주도권을 빼앗기 전에 그들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해 도박을 벌였다. 합리적인 계획만큼이나 전쟁 초기에 나타난 결과는 전 세계의 힘의 균형을 파괴시킨 전격전 전략이었다.
전격전이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을 상징하는 단어는 전격전(Blitzkrieg)이다.
전격전은 지상에서 대규모 기갑부대가 적의 방어 진지를 강타해 적을 마비시키고 후방 지역에 공포와 파괴를 확산시키며 공중에서는 수백 대의 급강하폭격기 슈투카가 적의 전투 대열과 피난민들을 폭격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하인츠 구데리안은“우리가 속전속결로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의 적들이 전격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라고 했으며 히틀러도“한 이탈리아인이 전격전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는 전격전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라고 말했듯 전격전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해 만들어진 전술도 아니었다. 지정학적으로 항상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잠재적인 적과 대치하고 있었던 독일은 잠재적으로도, 수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전투력을 극대화시킬 만한 군사력 운용 방법을 찾아야 했다.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제, 19세기 몰트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슐리펜 등은 기동성과 대담성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전의 전쟁을 분석한 독일은 젝트, 베크, 베르너 폰 프리치와 같은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유연한 전술적 사고, 모든 제대의 주도권 행사 및 공세적인 전투 지휘에 기반을 둔 독일군의 군사 교리를 정립했다. 이 결과 전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3대 전격전으로 알려진 1939년 폴란드 공격, 1940년 프랑스 전역 그리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전격전은 항상 적의 물리적인 자산을 파괴하기보다는 적의 정신적인 응집력과 의지를 파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합리적인 지휘체계를 갖고 있던 독일군과 명장들은
어떻게 20세기에 출현한 가장 사악한 정권인 히틀러의 나치에게
영혼을 팔았는가?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권력자로 군을 장악하면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도록 모든 군인에게 “나는 독일 제국과 국민의 최고 지도자이며 독일군의 통수권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용감한 병사로서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하나님 앞에 성스럽게 맹세한다”라는 충성 맹세를 강요했다. 독일을 거침없이 전쟁으로 몰아가던 1936년부터 1938년에, 조직적으로 자신에게 대항해 독일군을 동원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고위층 장군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했다. 1936년 라인 지방을 재점령했고,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확보한 그 후 4년 동안 히틀러와 히틀러의 독일군은 승리의 가도를 달렸다. 히틀러와 나치 통치 집단에 대한 반대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1942년까지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및 소련에서 히틀러가 거둔 승리는 그에게 완전한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장군들은 히틀러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항상 경고했지만,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는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절대우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독일인들과 일반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마술사가 됐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진급과 돈으로 장군들을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장군들에게는 진급과 함께 명예, 특권 및 부가 함께 따라왔다. 원수의 연봉은 2000년도 기준으로 약 2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외에도 새로 진급한 원수는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는, 세금이 면제된 현금을 받았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현재 가치로 100만 달러 상당의 첫 수당을 받았고, 리터 폰 레프 원수는 50만 달러 상당의 첫 수당을 받았다. 카이텔은 후에 추가 수당으로 300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보잘것없는 월급을 견뎌야 했던 장교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당시 독일의 산업 근로자들의 1개월 평균 봉급은 140달러였다.
이렇게 히틀러에게 영혼을 팔았던 독일 장군들은 승리했을 때 히틀러에게 영혼을 팔았고,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독일 장군의 정치적인 약점은 용서될 수 있지만, 그들의 도덕적인 파산은 해명하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다만 직업 군인이었을 뿐이고 나치와 무장친위대의 잔인한 행동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독일 장교들과 부대가 소련에서 나치의 킬러 부대들과 함께 협조된 작전을 했던 열정은 그들이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한 유대인과 슬라브족의 말살 작전에 얼마만큼 적극적인 동참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