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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 혁명 그 이후 1917-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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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14 회 작성일 24-12-16 21: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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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내전의 기록현대 전쟁사의 거장 앤터니 비버의 역작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된 뒤, 최대 1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끔찍하고 거대한 내전이 일어났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의 적군(赤軍), 이에 맞서는 백군(白軍)이 싸워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린 이 전쟁은 서쪽으로는 폴란드,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대륙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그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은 많았으나, 이후의 내전은 소략하게 다루거나 아예 그 과정을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20세기의 중요한 사건이다.러시아 내전은 단순히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독립하려는 신생 국가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독일, 기존의 동맹국이었던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까지 개입한 국제적인 분쟁이었다. 또한 적군(赤軍)과 백군 양측이 모두 학살과 고문을 일삼아 타국과의 전쟁보다도 훨씬 끔찍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한 국가 내에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무력으로 말살하려 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스페인 내전》, 《스탈린그라드》 등을 집필한 앤터니 비버는 복잡하게 전개된 러시아 내전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정리해 냈다.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새로운 자료들, 수많은 서적과 기록들을 모아 집필된 이 책에서 러시아 내전은 페트로그라드 거리의 노동자, ‘고요한’ 돈강의 초원을 행군하는 기병, 야전병원의 간호사 등 다양한 인물들의 눈으로 생생하게 재구성된다.2월 혁명과 10월 혁명, 그리고 내전의 시작1917년의 러시아 제국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시대착오적인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1914년부터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은 여기에 치명타를 날렸다. 도시에는 식량이 부족했고, 병사들의 불만은 쌓여만 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제국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두마(국회) 의원들로 내각을 구성해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조언에 “신민들이 짐의 신임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답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다. 결국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결과,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동생 미하일 대공도 황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하지만 임시정부 또한 독일과의 전쟁을 이어나가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10월에 적위대와 수병들을 동원한 무장봉기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가 설립한 인민위원평의회를 권력기구로 내세웠다. 이후 11월에 제헌의회 선거가 진행되어 사회혁명당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나, 레닌은 제헌의회에 권력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제헌의회는 단 한 번의 회의를 끝으로 다시는 소집되지 못했다. 제정이 붕괴된 2월 혁명 당시에는 어느 집단에서도 거의 반발이 없었으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이후에는 각지에서 장교, 카자크, 우파 사회혁명당, 체코 군단(본래 오스트리아군 소속이었으나 포로로 잡힌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하고 러시아군에 편입되었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때부터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광활한 유라시아를 배경으로 한 참혹한 내전러시아 내전은 20세기의 어느 전쟁과도 무척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장이 된 러시아는 너무나 거대했기에 철도와 강을 따라 전투가 벌어졌다. 끝없이 뻗은 평원, 침엽수림 한가운데로 수천 킬로미터로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볼가강이 주된 전장이 되었고 한 쪽이 기세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하다가 전투력이 소진되면 반격을 당해 또 수백 킬로미터를 물러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기병이 매우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되어 백 년 전 나폴레옹 시기를 연상시키는 기병 돌격이 유용한 전술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내전을 상징하는 무기 역시 말이 끄는 수레에 기관총을 실은 타찬카이다. 적군(赤軍)과 백군 모두 체제가 붕괴된 열악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후방에서 전방으로의 보급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고, 가장 중요한 보급 방법은 적 군수물자의 노획이었다.러시아 내전의 또 다른 큰 특징은 그 잔혹함이다. 억압적인 체제를 고수한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를 품은 적군(赤軍),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백군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며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볼셰비키의 비밀경찰이자 무장집단인 체카(KGB의 전신)의 고위직으로 있던 마르틴 라치스는 1918년 8월 《이즈베스티야》에 기고한 글에서 “확립된 전쟁 관행”은 쓸모없다고 밝혔다. “당신과 싸운 모든 부상자를 학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전의 법칙이다.”처형 및 고문 방식도 유달리 잔혹한 경우가 많았다. 백군은 포로로 잡은 공산당 정치위원(commissar)을 산 채로 불에 태우곤 했고, 적군(赤軍)이 점령한 지역에 투입된 체카 요원들은 반대자들을 체포한 후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어 손의 가죽을 그대로 벗겨 내거나, 어깨에 견장을 못으로 박는 등 글로만 읽어도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포로로 잡은 적 병사들에게 직접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죽이고 그대로 파묻는, 20년 뒤 나치의 인종 청소와 똑같은 양상의 학살도 벌어졌다.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본래부터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피해자가 되었다. 본래도 러시아 제국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반유대 조직 ‘검은 백인대’를 후원했을 정도로 유대인에 적대적이었는데, 그 뒤를 이은 백군 세력은 볼셰비키 중 유대인 출신 지식인이 다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탄압에 더 열을 올렸고, 정도는 덜했지만 적군(赤軍) 역시 유대인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전 기간 중 대규모 포그롬(유대인을 겨냥한 약탈과 폭동)이 수없이 일어나 우크라이나에서만 5만에서 6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러시아 내전의 본격화와 그 결말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赤軍)의 수뇌부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임은 명료하다. 그에 반해 백군은 가장 그 규모가 컸던 시기를 기준으로 세 개의 세력(동부의 백군 ‘최고지도자’ 콜차크, 남부의 데니킨, 서북부의 유데니치)으로 나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볼셰비키가 사방에서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적군(赤軍)은 러시아의 인구와 산업이 집중된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전선에 전력을 집중해 적을 무찌른 뒤 또 다른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식의 전략을 구사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또한 볼셰비키 정권의 군사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이전까지 철저히 배척했던 구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들을 ‘군사 전문가’란 명목으로 기용하고, 부사관 중 유능한 이들을 선발해 지휘관으로 발탁하면서 적군(赤軍)의 전반적인 역량을 향상시켰다. 트로츠키는 심지어 위기에 빠진 전선 각지로 직접 장갑열차를 끌고 나가 반격을 이끄는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적군(赤軍)의 반격에 가장 먼저 붕괴된 것은 서부 시베리아의 콜차크 군이었다. 교통의 요지인 우파와 옴스크를 차례로 빼앗긴 콜차크 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물러나야 했고, 결국 콜차크는 이르쿠츠크 인근에서 우파 사회혁명당, 체코 군단과의 불화 끝에 볼셰비키 측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러시아 남부에서는 한때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이 오룔을 점령한 뒤 모스크바로 가는 관문인 툴라를 위협하고, 북서부에서는 유데니치가 페트로그라드 바로 앞까지 진격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모두 패퇴하였다. 1919년 겨울이 되자 실질적으로 남은 백군 세력은 러시아 남쪽 끝 크림반도에 갇힌 브란겔의 군대뿐이었다. 동부 시베리아에는 부패와 잔혹성으로 악명이 높은 백군 군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미 대세는 정해진 뒤였다.다음 해인 1920년 가을, 폴란드와의 전쟁을 끝낸 적군(赤軍)은 백군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크림반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백군은 크림반도 곳곳의 항구에 군함을 파견한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20만 명 이상이 배에 올라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러시아 내전의 사실상의 종결이었다. 한편 다음 해인 1921년 2월, 본래 혁명에 앞장서 트로츠키가 직접 “러시아 혁명의 긍지이자 영광”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발트 함대 수병들은 계속되는 공산당의 독재와 식량난으로 인해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봉기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지시를 받은 투하쳅스키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혁명의 이상도 그와 함께 빛이 바라고 말았다.러시아 내전은 왜 적군(赤軍)의 승리로 끝났는가?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였지만, 내전 발발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대 낙관적이지 않았다. 혁명의 결과 장교들이 대부분 이탈하면서 군대는 완전히 붕괴했다. 혁명을 지키자는 구호 아래 모인 자원병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라 결국 징집을 해야 했다. 독일과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는 군사적으로도 열세였는데 트로츠키의 오판이 더해져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전역을 포기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산업과 농업도 잘못된 정책의 결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특히 도시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한다며 농촌을 상대로 실시한 무차별적인 징발은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로 이어졌다. 러시아 황실에 충성하던 카자크들에 대한 볼셰비키의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탄압과 학살의 결과,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자원인 그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에 등을 돌려 백군에 가세했다. 게다가 한때 볼셰비키와 협력했던 좌파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의 독재, 독일과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레닌을 비롯한 수뇌부가 암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하지만 그럼에도 적군(赤軍)은 승리했다. 앤터니 비버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볼셰비키 측이 훨씬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갖추었음을 지적한다. 적군(赤軍)도 백군에 못지않게 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무능함을 보였으나, 철저하게 수뇌부에 의사 결정을 집중한 그들이 분열된 백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당연했다는 것이다. 백군은 볼셰비키의 독재에 반발한 우파 사회혁명당, 제정 복고를 원하는 장교들, 사실상 반독립적인 세력이 된 카자크와 시베리아 군벌 등 서로 완전히 입장이 다른 여러 세력들이 모여 있어 처음부터 제대로 된 협력이 불가능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볼세비키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무력화한 볼셰비키의 독재와 정권 찬탈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면서도, 막상 ‘최고지도자’인 콜차크가 제헌의회 의원들이 구성한 행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는 등 반동적인 군사 독재로 일관했다. 또한 토지개혁 등 필수적인 사회제도 변혁에도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내부에서의 분열이 극심했고, 민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여기에 더해 백군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대(大)러시아 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당장 적군(赤軍)과의 싸움에서 밀리는 와중에도 강력한 동맹 상대가 될 수 있는 신생 독립 국가들에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레닌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더 중요한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핀란드, 에스토니아와 협정을 맺는 등 현실정치(realpolitik)에 충실한 면모를 보였다.동유럽의 지도를 뒤바꾼, 국제전으로서의 러시아 내전러시아 내전을 러시아의 ‘내전’으로만 보면 그 실체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은 지금의 핀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이었고, 제정의 붕괴는 곧바로 이 지역들에서의 독립운동을 촉발했다. 본래 러시아 차르가 핀란드 대공을 겸하는 형식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핀란드는 바로 독립을 시도했고, 자국 내에서의 내전이 보수파(백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독립에 성공했다. 다른 지역들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이 중부 열강과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독립운동에 불이 붙었다.볼셰비키는 독일의 패전 후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고, 내전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은 후 다시 이 지역들을 점령하는 한편 더 나아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으로 진격해 세계혁명의 초석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이들의 야망은 수도 바르샤바 앞에서 기적적으로 반격에 성공한 폴란드에 의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20년 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다시 이 지역들을 병합하거나 세력권에 넣었지만, 소련 붕괴 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폴란드를 비롯한 발트 3국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도 러시아 내전의 전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개입, 그리고 국제공산주의자들백군은 전쟁 중 동맹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일어났고, 동쪽에서 독일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한다면 서부 전선도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연합국은 제정 붕괴 후 들어선 임시정부에도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즉각적인 종전을 원하는 러시아 민중의 뜻과 어긋나 레닌과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전복할 명분이 되기도 했다.연합국은 러시아를 다시 대독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독일을 여전히 적국으로 간주하는 백군을 지원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지원을 이어나갔다. 특히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영국이었는데, 당시 영국의 육군부 장관인(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총리가 되는)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볼셰비키가 지배하면 영국에 재앙이 될 것이라 확신해 무기와 물자를 대량으로 지원하고 전차 부대와 공군 부대를 파견하는 등 백군을 강력히 지원했다. 하지만 이미 4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국의 상황을 걱정한 총리 로이드 조지가 더 이상의 개입에 선을 그으면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랬던 처칠이 20여 년 뒤 크림반도의 얄타(백군이 파멸을 맞았던 장소인)로 향해 스탈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큰 아이러니이다.적군(赤軍)에서도 타국 출신의 국제공산주의자들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소총 부대는 혁명 직후 취약했던 볼셰비키 정권을 수호하는 친위대 역할을 했고, 악명 높은 비밀경찰 체카(KGB의 전신)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폴란드인이었다. 헝가리에서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다 실패한 후 망명해 온 쿤 벨러와 같은 이도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포로들은 공산주의에 포섭되어 적군(赤軍) 편에 서서 싸웠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적군(赤軍)의 병사 혹은 체카 요원들로 활동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본래 제1차 세계대전 중 노동자로 고용되어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혼란 속에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여기에 주목한 공산 정권이 적극적으로 이들을 모집하면서 중국인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다수 결성되는 등 내전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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