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제가스토리를바라보는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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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저는 특정한 "패턴"을 계속 파악하려 합니다.
한마디로 감독이 무슨말을 하고싶은지에 대한 분석인거죠.
그런 과정은 언어로 딱 정리되는게 아니라,
눈을 감고 모르는 물건을 만지는 느낌과 같습니다.
"이쪽면은 이부분이 날카롭구나, 이부분은 아까 그부분처럼 여기가 날카롭네?"라면서 몸으로 느끼는거죠.
결국 영화란게 재미나 의미를 찾으려고 보는거지 이론을 탐구하려고 보는게 아니니까요.
기본적인 틀은 이런거 같아요.
개별자 : 시스템
이러한 구조로 플롯이 짜여져있느냐를 느낍니다.
단순하게 대중적인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려는 프로도와 반지를 차지하려는 악한 세력들이 이러한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를 확장하면 이렇게도 볼수있습니다.
개인 : 사회구조
소수 : 다수
개인 : 운명
의식 : 무의식
시선 : 시간
단색 : 다색
이러한 구조들로도 이야기를 바라볼수있습니다.
사회구조의 모순을 말한다는 봉준호의 영화를 보면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운명적 이야기를 말할때,
봉준호는 인간이 거부할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사회구조로 대체하여 이야기를 말한다고 느낍니다.
예를들어 <기생충>같은 경우 자본에 의해 나누어진 계급이 있고,
기택의 가족은 그 계급을 거슬러 올라가려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도덕적으로 잘못된것이었고,
기택의 가족이 붕괴되고 홀로 반성하는 기우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죠.
영화 내내 옅게 깔려있는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게 맞을까?"라는 기우의 죄의식이 개별자의 양심인것이고,
비도덕적일지라도 욕망대로 행동하고, 박사장의 집에 기생하는 가족들끼리 다투는 행태자체가 무질서한 시스템의 논리처럼 보입니다.
결국 영화의 방향은 기우의 성찰과 죄의식으로 수렴하지만,
비록 세상을 정직하게 산다한들 가난하고 학벌없는 이들이 높은 계급으로 오르기란 춘몽과 같다는것을 비유합니다.
만화 <원피스>에서 하늘섬 에피소드를 참 좋아합니다.
중학교때 읽었고 남들은 유치하다고 말하지만 전 그 에피소드가 깊이있는 고전문학들과 견줄만한 이야기라 생각해요.
하늘섬 에피소드는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하늘섬에 가고싶은 루피네의 꿈 : 하늘에 섬이 있을리 없다고 믿는 해적들의 태도
황금향을 증명하고픈 크리켓의 꿈 : 거짓말쟁이 집안이라 박해받아온 몽블랑 집안의 슬픔
행복한듯 보이지만 에넬의 지배에 길들여진 스카이피아 주민 : 에넬의 권력
에넬의 종이지만 역시 에넬에게 버림받은 화이트베레 : 에넬의 권력
샨도라를 되찾고 싶어하는 와이퍼와 샨디아의 전사들 : 에넬의 권력
과학의 발견으로 질병을 해결하고싶어하는 노랜드 일행 : 전통대로 신에게 제물을 바쳐 신앙으로 재난을 극복하려는 카르가라
하늘섬 에피소드는 결국 보수적인 편견과 권력에 의해 지배받는 소수의 집단이,
권력에 찌든 틀에박힌 다수 집단의 인식과 힘을 깨부수는 구조인겁니다.
에넬은 개인이지만 갈등하는 개개인을 억압할만큼의 힘이 있는것이죠.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를 개인의 이야기로 축소시켜도 "패턴"은 똑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법대생 청년 주인공이 악독한 전당포 노파를 살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전당포에서 돈을 빌려주는 늙은 할머니를, 오랜 고민 끝에 몰래 죽이고야 맙니다.
돈을 두둑히 챙겼지만 스스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돈은 쓰지도못하고 앓아눕기까지합니다.
세상은 누가 범인인지, 범인을 밝혀내려 혈안이 되있고,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을 홀로 견디는 주인공은 괴로워하죠.
이 이야기는 결국 "사람을 죽여선 안된다."라는 보편적 시스템의 논리와,
"누군가는 죽어도 된다."라는 개인의 논리가 충돌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근데 누군가를 죽여도 된다는건 반인류애적이고, 주인공은 홀로 그 신념을 떠안고 있죠?
이걸 반대로 뒤집어서 "사람을 죽여선 안된다."라고 인류애를 느끼는 개인은 괴롭지 않을까요?
아니요 똑같습니다.
이창동의 영화 <시>에서는 늙으막에 낭만적인 시를 쓰고싶어하는 할머니 양미자의 이야기입니다.
미자의 손자인 중학생 종욱은 친구들과,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듭니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사건을 입막음하려 기자와 학교 교사를 포섭하고 피해자 부모에게 줄 위자료를 모읍니다.
그래야 기껏 중학생인 아이들을 범죄자로 살게하지 않을수 있으니까요.
물질적 보상으로 범죄를 수습하려는 태도에 주인공 미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제가 말하고싶은것은 이렇습니다.
개인이 믿는 신념이 선하든 악하든, 개인을 둘러싼 다수의 정서가 반대된다면 개인은 악한게 됩니다.
다시말해 가치판단 자체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고, "악"의 속성자체가 다수의 정서에 반하는 정서라는 겁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보자면,
개별자 : 시스템으로 구분하는 이야기의 구조는 거의 모든 컨텐츠의 이야기들에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가 그런 구조적 특성이 제일 강했고, 드라마는 제가 보기에 그러한 구조가 거의 없습니다.
홍상수의 영화 <탑>을 보더라도 건물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시작된 관계가 어떻게 쇠락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안에서 주인공 병수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라고 느낍니다.
이는 말하자면 "병수 : 병수와 사람들의 관계변화"의 구조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뭐 예를들어 <토리노의 말>같은 영화는 황량한 벌판에서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삶을 연명해야하는 인간의 우울을 조명한 영화라는 겁니다.
전자는 "운명"이라고 말할수 있을테고, 우울을 겪는 인간은 "개별자"라고 말할수 있을테죠.
고리타분한 예술영화에만 이러한 구조가 있는게 아닙니다.
<탑건 : 매버릭>에서 죽은 친구의 아들이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도록 막은 주인공이,
한 인간의 자유를 똑같은 인간이 예속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죄책감을 느낍니다.
매버릭은 오랜 친구를 만나고는 그렇게도 군인이 되고싶어하는 친구의 아들을 자기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울먹이죠.
<아이언맨> 1편에서 무기를 개발하는데 천재적인 토니 스타크는 거만하고 두려울게 없습니다.
그러나 테러집단에게 납치당하고 의사인 잉센에게 구출됩니다.
그리고는 책임감없이 재미로 무기를 만들어대던 과거의 자신과 대비하여,
조그마한 여과장치에 삶을 연명하는 나약한 자신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잘만들어진 영화속 이야기는 제눈에 다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쇼생크탈출>은 앤디 : 쇼생크의 구조로 되어있는 겁니다.
로맨스 영화인 <러브레터> 조차도 제눈엔 그렇습니다.
시스템의 논리에 대응하는 개별자의 선택이 선한가 악한가는 이야기에서 중요하지않습니다.
주어진 환경안에서 갈등하는 개별자의 선택이, 어쩔수없는 것이었고 최선을 다한것이냐로 미학적이게 됩니다.
하나하나 다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들인데, 제맘대로 이렇게 후다닥 정리해버리는 글이라서 읽기 힘든 글일듯합니다.
저의 시선으로 설명할수 없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제가 플롯을 이해하는 실력이 부족했을수도 있고, 그걸 말하기위해 만든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이 세상엔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