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영화와스토리에대한단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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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은 진리나 철학에 대한것이라기보다 "원리"에 대한 것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칼융의 핵심사상이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당신이 가장 보기싫은 곳에서 발견된다."라고 말한다.
이는 플롯 안에서 캐릭터가 깨달음을 얻는, 혹은 관객이 깨달음을 얻는 구조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전개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정작 주인공은 앤디가 아닌 레드라 말할수 있으며, 앤디는 본인이 처한 외부환경을 보다 좋게 바꾸려는 희망적 인물이다.
반대로 레드는 그러한 주체적 삶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인 인물이며, 버스에 올라 국경을 건너며 맞는 그의 심정적 변화는 매우 극적이다.
그러므로 정말 "드라마"다운 플롯을 구성하고 싶다면 레드의 이야기가 가진 깊이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는 쇼생크 밖을 나가면 자신도 자살한 브룩처럼 사회에 적응할수 없을것이라 믿는다.
레드는 19년의 세월동안 앤디가 쇼생크 안에서 어떻게 희망을 잃지않으려 고군분투했는지 경험했고,
편지를 통해 앤디가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내게 기대어 줘요"라고 말하는 그의 진심을 통해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발로 친구를 만나러가는 여정이 그토록 설레인다는것을, 희망과 자유가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맨스 영화인 <러브레터>는 사실 "자신을 가학적으로 대하던 인물"이 "나는 빛나도록 사랑받았던 사람이었구나"를 깨닫는 영화다.
왜 자신에게 가학적인 인물이냐면 이츠키는 히로코의 편지를 받고 학창시절의 소년을 기억하기까지,
자신의 삶에 그런 남자가 있었는줄도 까마득히 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러브레터>에서 후지이 이츠키라는 여자는 타인에게 사랑받을리 없다고 여긴다.
그 소년을 좋아했던것 아니냐는 누군가의 말에 황급히 부정하는등의 태도를 통해,
그녀가 마치 사랑받는것에 대한 강력한 방어기제가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러브레터>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그림은, 위의 <쇼생크탈출>에서 친구의 편지를 보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것과 같이
자칫 유치한 설정이다. 다만 연필로 끄적인 그림따위로 극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철저한 이유는, 그녀를 사랑했던 소년의 "태도"때문이다.
이츠키를 연모하는 마음조차 그녀가 알면 두려울까, 상처받을까 두려워 책속에 고이 숨겨버리는 여리고 불완전한 미성숙의 마음때문이다.
등하교길에 심술궂게 종이가방으로 자전거타는 이츠키의 머리를 덮어버리거나,
전학을 가는대도 사실을 말하지 않아버리는
고약한 짝사랑 때문이다.
<러브레터>에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사람일리 없다고 여기는 가학성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이츠키에게 기침이 끊이지 않더니, 의식이 없을정도로 몸져 눕고만다.
이는 정말로 체력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높은 자성적 잣대로인해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순임이 간직해온 자신의 카메라를 돌려받는다. 영호는 카메라를 중고상에 3만원에 팔아버리고,
그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먹으며 기차가 지나는 길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영호는 신참내기 형사때 억지로 고문을 배우거나, 순임앞에서 식당 종업원을 보란듯이 성추행하거나,
군복무시절 계엄령이 떨어진 광주에서 여학생을 죽인 경험등을 통해 무자비한 인물로 변화해간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사회에서 생존해야하는 영호"가
"순임을 연모하며 흘리는 청춘의 눈물"이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다웠는지를 깨닫는 구조이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 영화의 극적 구조는, 관객이 인물의 용기있는 선택을 통해 격한 감동을 느끼는 영화와 미학적 구조가 비슷하다.
즉 주인공이 자신이 보기싫은 곳에서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구조는, 인물의 선택을 통해 관객이 가장 예측하지못한 곳에서
스토리의 극적인 미학을 발견하게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놀란의 <다크나이트>에서 고난을 겪어온 인물이 스스로 다크나이트를 자처하는 선택을 통해,
관객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곳에서 카타르시스를 발견하는 것 말이다.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은 고담시를 홀로 지켜오던중 지역검사로 하비 덴트가 부임하고, 도시의 안정을 도모하려한다.
하지만 조커에게 농락당하는 배트맨은 폭스에게 신뢰를 잃고, 사랑하는 레이첼을 잃고, 하비 덴트의 타락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보다 고난앞에 슬퍼해야할 인물은 고담시가 정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다크나이트"를 자처하고 하비덴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누명을 스스로 뒤집어 써버린다.
이창동의 <시>에서 낭만적인 시를 쓰고싶어하는 할머니 미자는, 손자가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든것을 안다.
하지만 가해자의 부모들은 피해자 부모에게 위자료를 주어 남학생들의 범행사실을 입막음 하려한다.
이에 미자는 죽은 소녀에 대한 깊은 슬픔과 손자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시>에서 미자는 결국 다소 좋지않은 방법으로 피해자 가족에게 줄 위자료를 마련한다.
그렇게 손자가 범죄에 연루되는것을 덮으려는듯 보인다. 하지만 미자는 용기있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치매가 심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자는, 아름다운 시 한편을 써내고야 만다.
도무지 결말을 상세하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주인공 파울의 개인적 욕망이나 전사는, 마치 살아있는 캐릭터가 아닌듯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소모품으로 희생당하는 그의 삶이 비극적으로 다가오는것은, 그가 동료들과 "가치있는 시간"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친구에게 가족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는 태도 같은 것은, 파울 역시 전쟁이 끝나면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친구에 대한 친절로서 말하는 것이다. 즉 인물의 서사를 말함에 있어 꼭 플래시백과 같은 방법으로 인물의 슬픈 속내를 말하기보다,
"무력한 환경속에서 인물이 어떤 선택과 책임을 감당 할수있는가"로 대체할수 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파울은 친구와 농장의 거위를 훔쳐 요리해먹거나, 친구의 편지를 읽어주거는 등의 유대를 쌓아간다.
이러한 감정들이 극적이고 처연하며 형형히 빛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정권이 그들의 젊은이들을 소모품으로 대하고있다는 잔인함 때문이다.
즉 그러한 "악의"또한 세계의 중요한 진실로 받아들여야, 그리고 플롯을 그러한 구조로 만들줄 알아야 애정의 가치도 소중해지는것이다.
<러브레터>나 <박하사탕>처럼 현재보다 과거의 애틋함이 중요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구조에서는, 현재가 불행해야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츠키나, 타인을 짓밟고서라도 양심을 속이며 살아가는 영호의 삶처럼 말이다.
자전적 이야기거나 과거의 추억에 연민을 부여하는 구조의 이야기는 "향수"의 감정에 쉽게 사로잡힌다.
향수는 자기객관화를 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독이되는 감정일테다.
나는 사실 옳게된 페미니즘 영화나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감상한 그레타 거윅의 <바비>나 리들리 스콧의 1991년도 영화 <델마와 루이스>같은 영화들을 보면,
여성은 당연히 행복해야하니까 바비랜드를 되찾는 것은 당연하고,
과거에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했으니 내가 지금 제멋대로 벌이는 살인과 일탈은 내 삶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태도가 페미니즘인가.
생각건데 거기에는 "책임"이 철저하게 결여되어있다.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정도가 올바른 페미니즘 영화다.
존윅 시리즈는 위대한 <존윅 4>를 감상하기위해 1,2,3 편을 어거지로라도 감상해야할 정도다.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언더 더 스킨>은 5년전에 감상했으며 내가 본 가장 이상한 영화로 손에 꼽는다. 별 2개를 주었다.
<언더 더 스킨>에서 감정이 없는 외계생명체인 주인공은 여성의 매력을 통해 남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다.
이는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성을 유지하기위해 자신을 타인과 비교우위에 둠으로서,
타인을 깎아내려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알량하게 채워보려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더 더 스킨>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순수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장애남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적 성장을 경험한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지려하지만, 자신이 생식기가 없어 관계를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인것을 깨닫고 절망한다.
종의 경계를 뛰어넘지못함에 절망하며, 흉측한 속내를 드러낸 채 외모만 인간인 자신의 외피를 슬프게 마주 바라본다.
나는 이 영화가 굉장히 좋아졌다.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을 감상하고는, 여태 본 영화들은 진정한 영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영화 <클레멘타인>을 감상하면서서 정말 배꼽잡고 웃을수밖에 없었으며, 별점을 매기기가 솔직히 난해했다.
일본애들은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라든지 <양지의 그녀>처럼 제목도 우스꽝스러운데
꼭 여자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버려야만하는, 카메라 노출을 최대치로 해놓고 촬영한듯 뿌옇기만한 이상한 영화를 잘도 만든다.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에서 신석호가
"배우로서 경험하는
직업윤리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것으로 3가지 에피소드가 묶인다.
배우가 되기위해 배우를 지인으로 아는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아갔고,
촬영을 하다 여배우를 껴안는것이 연인에게 미안해 독일까지 찾아갔고,
다시금 배우로 일하며 사랑하지않는 여자를 포옹하는 것이 죄스러워 기주봉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