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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의 포식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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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45 회 작성일 24-12-09 11: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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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의 포식자-7

 

7. 도망쳐 버렸다

코코아와 부드러운 푸딩을 담은 트레이를 직접 손에 들고 영주의 방으로 들어온 이현이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할 말을 잊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이현이 잠깐 고민했다.

‘어디 간 거지?’

욕실? 욕실 안에도 없다.

침대 아래에는 숨을 공간도 없다.

옷장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애당초 그런 곳에 숨을 이유도 없다.

영주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이현은 3분 정도 고민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녀가, 도망쳤다.

“이건 또 무슨 병신 같은 상황이지?”

아니, 방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달아났다. 왜?

대체 왜 달아났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그녀가 달아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일단 설주원을 찾아내서 그 섹스 동영상 원본을 손에 넣은 다음에 영주와 다음 일을 의논할 생각이었다.

그 동영상을 손에 넣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계획도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서둘러야 했다.

설주원이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서둘러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원본과 사본들까지 전부 입수한 다음에 설주원에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하게 단단히 협박한 다음에 영주와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볼 작정이었다.

일단은 입양 무효 소송, 그것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소송 자체는 별것 아니었고 영주의 의견이 조금 더 중요했다.

영주가 설주원과 왜 손을 잡았는지는 알고 있다.

영주 어머니, 그러니까 한 여사의 갤러리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갤러리는 원래 한 여사에게 주려고 했었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갤러리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갤러리를 통해서 비자금을 세탁해서 빼돌릴 일은 없었다.

아버지가 해 온 행동들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아버지의 잘못된 방식들은 버리고, 제 방식으로 제 길을 걸어 나갈 생각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갤러리는 굳이 돌려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 갤러리 안의 그림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그림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림]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만으로 족했다.

원래 그림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그 갤러리에 있던 그림들 중에서 이현의 마음에 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할 일은 없다.

그 갤러리는 한 여사에게 주고 영주가 계속 그곳에서 큐레이터로 있는 것이 오히려 이현이 바라던 것이었다.

영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풍경은 그 갤러리였다.

그곳에 있을 때 영주는 가장 빛이 난다.

이 집은 영주의 빛을 빼앗아 버린다.

그래서 영주가 언제까지나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녀가 가장 빛날 수 있는 장소에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만들어 주려고 했었다.

입양 무효 소송만 끝나면 갤러리 명의를 옮겨 주고 한 여사에게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건네려고 했었다.

죽은 아버지의 다른 혼외자식들에게는 그런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살 만큼은 챙겨 나갔다.

이현은 딱 그 정도만 눈감아 줬다.

그래, 먹고살 건 있어야지.

그러나 회사에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던 그건 상관없지만 제 영역 안에서 자꾸 눈에 띄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고 그 짜증 나는 일은 아버지 살아생전에 충분히 참아 줬었다.

그런데 설주원이 기어이 욕심을 과하게 부렸다.

SC건설은 그에게는 과분한 자리였고, 그 자리에 앉힐 다른 적임자를 이미 정해 놓았다.

그 분야의 전문 경영인이 충분히 맡아서 회사를 키울 수 있는데 그저 낙하산 수준밖에 되지 않는 설주원을 왜 SC건설 사장으로 두겠는가.

설주원이 수상쩍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하니 그런 치사하고 비겁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이현은 비겁한 방법은 써 본 적이 없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현은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포식자다.

저보다 약한 피식자 앞에서 비겁한 수작을 부리는 포식자는 없다.

포식자는 관대하거나 무자비할 뿐이다.

어제 이 집에 들어온 영주를 봤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한영주다] 이것이었다.

장례식 이후로 처음 본 영주의 모습에 솔직한 심정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영주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기뻤지만 그녀를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 그녀 혼자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설주원이 끼어 있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녀를 이 집에 두는 것이 낫지만 그녀를 위해서는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제 발로 이 집을 나가게 했었고 이번에는 억지로라도 쫓아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밤새 그런 일이 일어났다.

꿈인 줄 알았다.

정말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영주의 꿈을 꾸는 거라고, 제 꿈에 영주가 나타나 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고 꿈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실제였다면 절대로 못 했을 일들을 꿈이니까 망설임 없이 행동했었다.

제 꿈에 벗은 영주가 나타났고 꿈이니까 그녀를 향한 욕망을 거침없이 풀어냈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꿈이 아니었다.

밤새 한 짓이 꿈이 아니었고 그녀도 당황하고 이현도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가 하면 평소 입에도 대지 않던 코코아까지 마실 정도로 당황했었다.

마시면서 단맛도 느끼지 못했다.

뜨거운 것도 모르고 마시느라 입천장이 다 벗겨졌지만 그걸 나중에 알아차릴 정도로 몹시 당황했었다.

아마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황했다.

그게 꿈이 아니라서 당황했고, 꿈이 아니라 가슴이 두근거리며 묘한 희열을 느끼는 자신에게 두 번 당황했다.

그리고 영주와 다시 섹스하고 싶다는 충동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스스로의 무절제함에 세 번 당황했다.

그래서 일단 영주를 방으로 올려 보냈었다.

설주원부터 처리하고 그 동영상을 손에 넣은 후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전부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영주를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설주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은 쉬웠다.

그에게서 동영상의 원본을 빼앗고 사본 여부까지 확인하는 것도 쉬웠다.

그런 다음에 법무팀을 불러들여서 영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입양 무효 소송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면 언제 끝낼 수 있는지 시간의 여부를 듣고 영주를 설득하려고 했다.

선은 이미 넘었다.

선을 넘기 전에는 그 아슬아슬한 마음의 선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노력했었지만 타의에 의해 선을 넘어가는 순간 다시 그 선을 되넘어오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미 선을 넘었다면 남은 것은 거침없이 다가서는 것이다.

입양이 무효가 되면 영주와 자신은 남남이다.

그러니까 못 할 짓이 없다.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할 이유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먼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녀다.

사진만 찍으려 했든 뭘 하려고 했든 간에 그녀가 제 방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녀가 제 위에 먼저 올라탔으니까 그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잠자는 맹수의 위에 올라탔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평생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입양 무효 소송이 끝나는 대로 바로 약혼부터 하자는 말을 꺼내려고 방에 들어왔더니, 그녀가 없다.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도망쳤다.

섹스하고 도망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방에 가 있으라고 했다.

여기가 방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없는 거지?

“기가 막혀서.”

이현이 혀를 찼다.

“도망친다고 해서.”

그리고 곧 이를 악물었다.

“못 찾아낼 줄 아는 모양인데.”

이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원이 꺼져 있어……]였다.

“한영주. 이렇게 나온다 그거지?”

휴대폰의 전원도 끄고 도망쳤다?

“내가 누군지 보여 줘야겠네.”

그녀는 자신을 아주 잘못 봤다.

한번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도망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 그녀의 실수다.

그게 설주원의 실수였고, 그게 한영주의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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