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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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피-8
한밤의 손님들
“뭔 눈이 이렇게 내리는지...”
하늘에서 멈추지도 않고 내리는 눈을 쓸던 여관 주인이 허리를 펴며 불평을 토해냈다.
눈 때문에 손님도 없는데 하루 종일 눈을 쓰느라 허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폭설도 이런 폭설이 없다.
“어?”
그때였다.
허연 눈 속에서 누군가 나타난 것이다.
머리와 어깨에 눈을 잔뜩 이고 나타난 것은 지쳐보이는 여인이었다.
“혹시 하룻밤 묵어갈 방이 있을까요?”
손님이다.
이런 폭설에 손님이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손님이 나타나자 여관 주인이 눈을 쓸던 빗자루를 집어 던지고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화로에 숯을 잔뜩 넣어 훈훈하게 데워진 방 안으로 들어온 해원이 여관 주인이 들고 들어온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 발을 담궜다.
“이제야 겨우 살 것 같네요.”
“이 겨울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요? 이 근방에 사는 것 같지는 않고...”
여관 주인이 해원을 힐끗힐끗 살폈다.
살결이 흰 것을 보면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은 아니다.
이곳은 바다에 인접하고 있어서 햇살이 강하고 바람이 세다.
땅이 척박하면 사람들도 척박하기 마련인데 지금 이 여관의 유일한 손님인 이 여인은 한 눈에 봐도 이런 척박한 땅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곱게 생겼다.
입고 있는 옷은 낡고 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모가 가려지는 건 아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주인이 가져온 뜨거운 차를 마시며 해원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작게 웃었다.
주인이 보기에도 보통 미인이 아니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요?”
“그건 모르겠어요. 어디에 사는지 모르거든요.”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사람을 찾고 있단 거요? 거 참...”
“아는 거라고는 서쪽의 바닷가에 살고 있다는 것과 바다 근처에 대나무 숲이 있다는 정도예요. 그 사람은 의원이구요. 혹시 이 근방에 대나무 숲을 끼고 있는 바다 근처에 사는 의원이 있나요?”
“처음 듣는데...”
여관 주인이 열심히 생각을 떠올려봤지만 그런 의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바다 근처는 다 뒤지고 다니는 중이에요.”
“이 근방에 그런 의원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소.”
“그렇군요...”
해원이 적잖게 실망했다.
그러나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쉽게 무랑군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도망치듯 떠나온지 여섯달이나 지났다.
장마가 한참일 때 도망쳐나와서 해가 지나 지금은 1월이다.
도망쳐 나올 때 입었던 옷 대신 도중에 민가에서 바꾼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때 챙긴 것들을 노자 삼아서 여섯달째 무랑군이 살고 있을 만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서쪽의 바다. 그리고 대나무 숲과 의원.
아는 것은 그것 밖에 없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해원은 알고 있다.
어쩌면 평생 그를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원도 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평생이 걸려도 그를 찾을 생각이다
.
그러다가 그를 찾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실망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그를 찾아 헤매는 도중에 어느 대나무 숲에서 잠이 들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다시 그를 꿈결처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찾을 수도 있고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찾는 이 시간이 해원은 좋다.
그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긴 시간도 견딜 수 있다.
물론 언젠가는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를 기억하고 그를 기대하고 싶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만 해요.”
친절한 여관 주인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자 혼자가 된 해원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서 발을 빼고 낡은 이불 위에 누웠다.
화로에서 숯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이 방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다.
‘그 분이 계시는 곳에도 눈이 내릴까...’
여섯달.
해원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해원 자신도 알지 못했던 변화다.
하지만 황궁에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원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다.
달거리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 발정이 아닌 진짜 달거리였다.
스물 두 살의 여름에 찾아온 진짜 달거리 앞에서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그때 해원은 자신의 저주가 끝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제게서 단내를 맡는 사내는 없었다.
혼자 여행하는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며 치근덕거리는 사내는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단내 때문은 아니었다.
남들과 똑같아진 것이다.
해원은 제 저주가 사라진 이유를 모른다.
그건 갑자기 사라졌고 그 이후로 단내는 다시 나지 않았다.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도 자유롭게 다니고 사람들을 의식할 이유도 없었다.
해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가 마음껏 그 사내를 찾으라고 주어진 자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에 10년 후에 그곳을 찾았는데 그 분이 날 잊었으면 어쩌지...’
이런 괜한 걱정도 한 번 해본다.
10년, 혹은 20년 후에 서쪽 어느 바닷가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돌아서야 하는 걸까.
‘별 걱정을 다해...’
해원이 하품을 했다.
오늘 너무 많이 걸었다. 그리고 추위에 떨었던 몸이 따뜻한 화로의 온기에 녹으며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이내 벌어진 입술에서 고른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쾅-쾅-쾅!
“네, 네, 나갑니다. 나가요, 나가.”
한 밤중이 다 되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다가 말고 여관 주인이 졸린 눈을 연신 비비며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눈을 잔뜩 뒤집어쓴 사내가 안으로 얼른 들어왔다.
“얼어 죽는 줄 알았소.”
사내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머리와 어깨를 덮고 있던 눈을 털어냈다.
“몸부터 좀 녹입시다.”
“이런 날씨에 얼어 죽고 싶어서 이 밤에 돌아다니는 겁니까?”
여관 주인이 딱하다며 혀를 찼다.
“죽지 않았으니 되었잖소.”
그런데 이 사내, 참 태평스럽게도 대답한다.
“따뜻한 차라도 드릴까요?”
“그래주면 나야 좋지요.”
여관 주인이 화덕에 올려놓았던 주전자를 내려 찻물을 우렸다.
“급한 볼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오늘은 정말 이상하게 손님이 있는 날이다.
이런 날씨에는 보통 손님이 한 명도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초저녁에 손님이 한 명 들어오고 지금 또 들어왔으니 이 밤에만 손님이 두 명이다.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요.”
또 사람을 찾는 손님이다. 요즘은 사람 찾기가 유행인 걸까?
“누가 돈이라도 떼먹고 달아났습니까?”
“그건 아니고...데리러 갔는데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소.”
“저런. 길이 어긋나면 다시 만나기가 힘들 텐데...어디서 보자 약속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속을 못했소. 내가 사는 곳이 어딘지도 알려주지 않아서...아마 내가 사는 곳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까 싶소.”
“그런데 여기까지는 왜 오신 겁니까?”
“그녀가 사는 곳에 갔더니 그녀가 나를 찾아 떠났다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그녀의 행적을 뒤따라서 밟아가는 중이요. 이렇게 흔적을 쫓아 뒤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요.”
“그 만나려는 사람이 여길 지나갔답니까?”
“마지막으로 그녀를 목격한 사람이 그녀가 여기로 향했다고 했소. 그러니까 이대로 바다로 쭉 향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녀는 나보다 고작 하루 밖에 앞서지 않았으니까 말이요.”
“바다라...”
그런데 이 비슷한 내용의 말을 꼭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찾는 사람. 바다.
“내가 사용할 방으로 안내를 부탁하오.”
차를 다 마신 사내가 봇짐을 들고 일어서자 주인이 화로를 들여놓은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런 겨울에는 모든 방에 불을 넣지 않는다.
자칫 숯값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서 두 개의 방에 화로를 켜 놓았는데 딱 두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먼저 온 손님이 묵은 바로 옆의 방에 두 번째로 온 손님을 들여보낸 주인이 하품을 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밤에는 더는 손님이 안 오겠지.’
만약 온다면 숯을 더 피워놓아야 한다.
그건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라서 여관 주인은 손님이 더 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사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폭설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따라잡았을 텐데...’
여섯달 만에 지금 그녀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왔다.
겨우 여기까지 따라잡았다.
‘날이 추운데 고뿔이 들진 않았을까...’
만약 고뿔이 들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고쳐줄 수 있다.
명색이 의원인데 그걸 고쳐주지 못할까.
‘그 몸으로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사내는 해원을 데려오기 위해 황궁이 있는 곳까지 갔었다.
그러나 사내가 황궁이 있는 도읍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황제는 죽었고 공주 역시 황제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며칠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그녀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황궁에서 시녀로 일했다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에게서 [불탄 별궁에서 발견된 시신은 한 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타 죽은 건 한 명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죽었고 그녀는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계속 생각했다.
죽지 않았는데 그녀는 왜 죽은 척 했을까.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도망친 것이다.
도망쳐서 어디로 향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아는 건 서쪽, 바다, 대나무 숲, 그리고 의원이라는 직업과 자신의 이름 뿐이다.
그것만 가지고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를 뒤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서쪽으로 향했을 테니까 사내도 서쪽으로 향했다.
바다가 있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혼자 여행하는 젊은 여자에 대해 물으며 다녔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듣거나 그녀가 머물렀다는 곳이 있으면 그곳까지 한 달음에 달려갔었다.
하지만 그 중 절반은 비슷한 사람이었고 절반은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그녀의 확실한 행적을 잡은 건 두 달 전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그 흔적을 따라왔다.
그리고 오늘 정오에 산 너머의 마을에서 대나무 숲을 끼고 있는 바다 근처에 사는 의원을 찾는 여인에 대해 들었다.
그녀가 확실했다.
다들 눈이 많이 내려 산을 넘어갈 수 없으니 하룻밤 묵고 다음날 가라고 했지만 사내는 지체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를 놓치면 정말 기회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폭설이면 그녀도 발이 묶였겠지. 아주 거리가 많이 벌어지는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보지만 지금 여기 누워있는 것 자체가 사냐는 불편했다.
그러나 저 폭설을 뚫고 갈 방법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눈이 그친 것을 확인하고 바로 길을 떠나자.’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잠들어야 한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사내가 잠을 청했다.
운이 좋으면 내일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면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지난 여섯달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정작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꿈같은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는 처음 만나는 거니까 대체 뭐라고 인사를 해야 좋은 걸까.
‘잘 지냈냐고 하면 너무 우습겠지.’
눈을 감은 채로 사내가 살짝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이런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한 여인을 찾아서 여섯달 동안이나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는 자신이라니.
그것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인을 찾아서 이 겨울에 이러고 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그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이어졌을까...’
그녀와 그 대나무 숲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사내도 모른다.
그게 대체 무슨 조화였을지 사내도 모르고 아마 그녀도 모를 것이다.
그걸 누가 알까.
‘피곤하군...’
사내의 눈이 이제야 겨우 감겼다.
잠들기 전에 사내는 그녀의 얼굴을 본 것도 같았다.
물론 꿈이겠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것 같아서 사내가 눈을 감은 채로 살며시 웃었다.
오늘 밤에는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
“짐은 다 챙겼고...”
해원이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입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아침밥은 여관 주인이 방으로 가져다 준 것을 한톨도 남김없이 전부 다 먹었다.
오늘 또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모르니 잘 먹는 것이 중요했다.
“눈이 그쳤다니까...”
여관 주인은 오늘 날씨가 아주 좋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바다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관 주인은 그런 의원에 대해 듣지 못했다고 하니 오늘 가는 바다에 그 사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런 다음에 다른 마을로 떠나면 된다.
봇짐을 등에 매고 해원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하룻밤 잘 묵고 갑니다.”
“찾는다는 사람을 잘 찾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 해원이 바깥 문을 열고 나섰다.
안쪽의 훈훈한 공기와는 다르게 매서운 공기가 뺨에 닿자 해원이 얼른 목도리를 둘렀다.
“춥구나...”
눈은 그쳤지만 그래도 한 겨울의 날씨는 춥다.
하늘은 맑았다.
어제처럼 시야를 가리는 폭설이 내리지 않으면 이 정도면 날씨는 매우 좋은 편이다.
‘이제 가볼까...’
해원이 걸음을 옮겼다.
눈 위를 자박자박 밟아가는 해원의 뒤에서 여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마 저 여관에 묵었던 손님 중의 한 명이 자신처럼 이제 길을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나와 방향이 같은가...’
해원이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살짝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눈을 밟는 소리와 뒤에서 눈을 밟아오는 소리가 약간씩 엇갈렸다.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좋구나...’
만약 이런 길을 혼자 걷는다면 무척이나 쓸쓸하겠지만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이 걷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저 사람은 어디를 가는 걸까...이렇게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거라면 급하게 서둘러서 가야 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걷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들이 많아지는 법이다.
어쩌면 대단히 중요한 물건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집에서 기다리는 병든 아내에게 줄 약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장사꾼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좋은 자리를 선점해 물건을 팔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해원이 걷는 길은 외길이다.
그러니까 뒤에서 오는 사람과 자신은 적어도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는 이 길을 함께 걷는 [동행]이다.
‘보폭이 크지만 빨리 걷지는 않는구나.’
이렇게 조용히 걷다 보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기 마련이다.
보폭이 크다는 건 키가 크다는 것이고, 그런데 자신을 앞지르지 않는다는 건 천천히 걷고 있다는 뜻이다.
아침 일찍 출발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으면서도 빨리 걷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 한참을 걷던 해원의 이마에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꽤 많이 왔구나...’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걷는 것이 힘들었었다.
황궁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걷는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 종일 걷고 그 날 밤에 다리와 발이 퉁퉁 부어 울면서 잠이 들기도 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는 발이 너무 아파서 걷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걸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익숙해져서 하루 종일 걸어도 끄덕없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것이 무서웠었다.
혼자 걷다가 지금처럼 저렇게 뒤에서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면 강도가 아닐까 도적이 아닐까 저를 해치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무서움이 왈칵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걷는 길에 저렇게 누가 뒤에서 따라와도 무섭지가 않다.
오히려 혼자가 아니라서 반갑기까지 하다.
여섯달 만에 자신은 참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황궁 밖으로 나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다.
아마 이런 자신을 보면 유모가 깜짝 놀랄 것이다.
대견하다 여길 수도 있다.
이제는 여비가 모자라면 남의 집 일을 도와주는 법도 익혔다.
더 이상 손이 진주알처럼 곱지 않고 차가운 바람을 맞아 뺨이 트기도 했지만 상관없다.
지금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이렇게 마음이 가벼웠던 적이 또 있었던가.
지난 여섯달은 해원에게 있어서 몸이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즐거웠다.
매일 만나는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설렜고 다리가 아파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언제나 길 위를 걷고 있는 자신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조금 쉬었다 갈까...’
세 시간은 쉬지 않고 걸은 것 같다. 쉬어 갈만한 곳이 나오자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해가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앉았다.
그냥 앉으면 차가우니까 봇짐을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은 해원이 여관을 나올 때 여관 주인이 챙겨준 것을 꺼내 펼쳤다.
품속에 넣어 와서 아직 식지 않은 주먹밥이 그 안에 있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지만 지금 이걸 먹고 부지런히 걸으면 도중에 주막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주막에 뜨거운 음식을 먹고 근처에 대나무 숲을 낀 바다가 있나 물어보자.
바다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바다 가까운 곳에 여관이 있는지는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응?’
주먹밥을 손에 쥐었을 때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그녀가 얹은 널찍한 바위 끝 쪽에 누군가 앉았다.
아마 뒤따라오던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도 해원이 그런 것처럼 부스럭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 역시 여관 주인이 싸준 주먹밥을 꺼냈을 것이다.
해원이 주먹밥을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
아침밥도 그렇도 여관 주인의 음식 솜씨가 좋다.
‘아, 물을 빼먹고 왔구나.’
주먹밥을 씹으며 해원이 그제야 물을 두고 온 것을 알아차렸다.
주먹밥을 그냥 먹으면 목이 메인다며 여관 주인이 친절하게 물까지 챙겨줬는데 그만 그걸 두고 오고 말았다.
‘어쩌지.’
입안에 든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곤란해하고 있을 때였다.
“물을 가져오지 않았으면 이거라도 드시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원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람의 친절한 배려에 감사의 말이라도 하고 물을 받으려고 고개를 돌린 해원이 잠시 그대로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지금 해원은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아니면 헛것이라도 보는 걸까?
자신이 여섯달 동안 찾아 헤맸던 사내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이다.
물통을 내민 채로 사내 역시 해원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사내도 해원도 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사내는 물통을 내밀고 있는 채로, 해원은 주먹밥을 입에 넣은 채로 그렇게 멈춘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면 이 꿈이 깨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움직이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사내였다.
“물이라도 마시거라.”
사내가 물통을 내밀었다. 해원이 그가 내미는 물통을 받아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이게...”
사내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 말고 그만 웃고 말았다.
사내가 웃자 해원도 덩달아 웃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서 사내도 해원도 길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참이나 크게 웃은 다음에야 사내가 해원의 곁으로 다가와 앉아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더 가봤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와 함께 돌아가자.”
“그럴 생각이었어요.”
만나려던 사내가 지금 제 옆에 있다. 만나려던 이를 만났으니 이제는 길을 헤맬 이유가 없다.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내를 만났다.
그러면 된 것이다.
“조금 더 일찍 만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랬어요.”
“기다리지 그랬느냐. 데리러 갔는데.”
“기다리지 그러셨어요. 찾아갈 수 있었는데.”
사내가 문득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단내가 나지 않는구나.”
“병이 나았나봐요.”
자신의 몸에서 단내가 나지 않아 이 사내가 저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잠시 그런 염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해원은 그것이 자신의 괜한 걱정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제 손을 잡은 사내의 손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뜨겁고 힘이 억세다.
제 손을 꽉 잡아오는 사내의 손으로도 해원은 이상할 정도로 사내의 지금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나 이 사내의 마음이 같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여관으로 돌아갈까?”
사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해원이 먼저 말했을 것이다.
“빨리 돌아가요.”
자신의 음란함은 어쩌면 병이나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사내 한정으로, 자신은 어쩌면 앞으로도 사는 날 내내 음란한 체질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 사내와 손을 잡는 순간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자신은 이 사내에 대해서는 이렇게 발칙하게 음란할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시간은 넉넉하잖아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지만 시간은 넉넉하다.
이제 자신들을 갈라놓을 것은 없다.
그러니까 일단 몸에 붙은 불부터 끄는 것이 급선무다.
그날 여관 주인은 아침 일찍 떠났던 두 명의 손님이 손을 잡고 돌아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여관 주인으로서도 나쁘진 않았다. 이틀 연속으로 손님이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첫날에는 방을 두 개를 썼던 손님들이 오늘은 방을 하나만 쓰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찾던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사람 좋은 여관 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두 명의 손님은 사흘 정도를 그 여관에서 머물렀다가 떠났다.
볼 것도 없는 시골 여관에서 사흘 동안 있으며 무엇을 했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여섯달 만의 회포를 풀기에는 사흘도 모자랐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