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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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5
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인적이 드물었다. 창문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에 바깥 풍경이 얼룩져 보였다.
구질구질하게도 내리네. 이런 날은 혼자 있기 싫은데. 날씨도 조금 춥고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다.
나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으며 나직이 말했다.
“더 마시고 싶은데.”
지헌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문을 연 술집이….”
“그냥 편하게 너희 집으로 가서 마시자.”
“지금?”
“응.”
어쩐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왜? 전에도 자주 갔잖아.”
“너 많이 취했어. 그리고 오늘은 나도 좀 위험한데.”
아까부터 들떠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웬일로 멈칫한다. 기다렸다는 듯 신나서 날아갈 줄 알았더니. 술 취한 여자 데리고 자는 건 양심에 찔리나 보지.
“잘됐네. 나도 오늘 좀 위험해지고 싶거든.”
“갑자기 왜 그래? 오늘 무슨 날이야?”
“글쎄. 6월 9일이라서? 야해지고 싶은 날이잖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내가 한 말이 웃겨서 푸읍,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헌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 술 먹으니까 귀엽긴 한데, 앞으로 술은 나하고만 먹자.”
오피스텔 주차장에 내린 지헌은 내 팔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술 취한 여자 상대하는 건 별로라고 점잔 떨더니 마음이 변한 내가 도망갈까 조바심 내는 모습이 우스웠다.
지헌의 집 문 앞에서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와의 잠자리에 과하게 의미 부여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선뜻 발이 안 떼어졌다.
돌이켜 보면 이런 걸 바로 촉 혹은 전조라고 하는 걸까. 비밀번호를 누른 지헌은 현관문을 열고 나를 돌아보았다. 표정은 역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헌이 한 발 다가왔다. 얼굴은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균형 잡힌 건장한 몸 형태만 보였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지헌이 물었다.
“왜 도망가?”
“안 도망갔는데?”
성큼 다가온 지헌이 내 팔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망설이는 나를 지헌이 끌어당겼다.
딱히 뭐 때문이라고 꼬집을 수는 없지만, 집 안에 발을 들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잡한 마음은 제대로 들여다보기도 전에 흩어졌다.
“너 진짜 사람 제대로 꼴리게 하는구나.”
현관문을 닫자마자 나를 구석으로 몬 지헌이 거침없이 내뱉었다. 단어 선택이 노골적이었다. 놀란 눈으로 지헌을 돌아보았다. 지헌은 내 귓불을 꽉 깨물었다.
“너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오늘 작정하고 사람 홀리네.”
바짝 밀착된 지헌의 성기는 뚜렷한 부피감으로 솟아 있었다.
또 뭐 때문에 발동이 걸렸을까.
순간 센서 등이 꺼지고 사위가 깜깜해졌다. 발로 더듬다가 현관 턱에 다리가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쓰러진 내 뒤로 지헌이 달려들었다. 치마를 허리까지 밀어 올리고 팬티스타킹과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아…!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노출된 하체에 당황해서 앞으로 기어갔다. 벗기다 만 스타킹과 속옷이 허벅지에 어중간하게 걸려 있어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 상태로 지헌이 허리를 잡고 급히 하체를 겹쳐 왔다.
설마 이렇게…?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뒤에서 지헌의 성기가 묵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빠듯하게 들어차는 압박감에 눈이 커지고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흥읍… 읏.”
생각보다 더 감당하기 힘든 쾌감이었다. 나는 지헌에게 가장 깊은 곳을 꿰뚫린 채 숨을 헐떡였다. 소름 돋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더듬더듬 기어가자 지헌이 허리를 잡고 쭉 끌어 내리며 느끼는 곳을 연속으로 찌르듯이 밀어 올렸다.
지헌에게 익숙한 몸은 이미 음식점에서부터 음란하게 젖어 있었다. 달아오른 속살을 꿰뚫는 살덩이는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지헌이 더욱 깊이 들어오도록 했다.
덕분에 위에서 거의 직각으로 내리꽂혔다.
지헌은 말없이 내 골반을 붙잡고 연속으로 강하게 허리로 내려쳤다. 그동안 참았던 게 터지듯 사나운 몸짓이었다. 그때마다 으, 읏 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6월 9일이 뭐가 어째? 야해지고, 싶은 날?”
쭉 몸을 빼낸 지헌이 내 귓가에 거친 숨을 뱉어 내며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이어서 힘껏 허리를 쳐올리며 말을 짧게 끊었다.
“겁도, 없이. 응? 어디, 얼마나 야해지나… 보자고.”
퍽퍽 부딪쳐 오는 몸짓에 눈앞이 어지럽고 온몸이 끝없이 뒤흔들렸다. 몇 번이고 절정을 맞이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참다못한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연신 비명을 질렀다. 사정하는 순간 지헌은 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강하게 키스했다. 위아래 모두 뜨거운 살덩이로 휘저었다.
현관 센서 등이 눈앞에서 깜빡깜빡한다.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였다. 귓가에 흐트러진 숨이 쏟아졌다.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느껴졌다. 지헌은 나를 칭칭 얽매듯이 끌어안고 몸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만져 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깨어났다는 걸 알면 반응을 보일 때까지 괴롭힐 게 뻔했다.
지헌이 강요하지도 않았고 은혜를 갚으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내게 이런 걸 원했던 건 자명했다. 그냥 이게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다. 받은 게 많으니까. 나도 지치기도 했고.
사실 될 대로 돼라 싶었다.
내일 수업이 뭐였더라? 리포트 제출이 내일까지든가 모레까지든가?
다시 잠이 드는 순간까지 나는 어깨 위에 짊어진 무게를 벗지 못하고 생각을 더듬다가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드르륵, 하고 커튼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찌푸린 얼굴을 베개 밑으로 처박았다.
“더 자게 해 주고 싶은데 수업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이어서 뭉친 근육을 풀어내듯 어깨를 주물렀다. 신음을 내며 빛을 피해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지헌은 내가 장난친다고 생각했는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단정히 옷을 차려입은 지헌이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멍한 머릿속으로 정지헌 집에 오게 된 기억을 천천히 되짚다가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정색하는 말에 지헌이 싱긋 웃었다.
“사람 달아오르게 하고 중간에 잠에 빠져들었잖아. 조금 심술부린 거야.”
미친놈.
입에서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잠에 빠져든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가히 알 수 있었다.
“잠 깼으면 나와. 아침 해 줄게.”
“생각 없어.”
“생각 없어도 나와. 오늘 연강이라 밥 먹을 시간도 없잖아.”
“귀찮아. 그냥 커피나 한 잔 줘.”
“빈속에 커피 마시다 또 위장병 난다. 얼른 나와.”
시험 기간 때면 입맛이 없어서 커피로 때우곤 했는데 그러다 위장염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지헌은 그때 일을 언급하며 내 말을 단호히 자르고 방을 나갔다. 이어서 퉁퉁 야채 써는 소리,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뭔가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아침이라니, 의외다. 간단하게 커피 한 잔으로 때우게 생겨서는.
일어나서 방을 나서는데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리포트가 눈에 들어왔다.
“…….”
부엌에서 식사 준비로 분주한 지헌을 흘끔 쳐다보고 리포트를 집어 들었다. 앞 장부터 천천히 훑어 내리는데 익숙한 내용이다. 그저께 내가 밤새 풀던 케이스였다.
지헌도 내게 주려고 급히 리포트를 작성한 듯 책상 위에는 네다섯 권의 교과서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나마 여러 서적을 참고해서 작성했다는 게 스크래치 난 자존심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토막토막 논점을 나열한 나와 달리, 지헌의 리포트는 물 흐르듯이 서술되어 단순히 암기해서 작성했다는 인상이 없었다. 사소하지만 큰 차이였다.
“너도 참 대단하다. 지금 그게 눈에 들어와?”
문가에 기대선 지헌이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리포트를 들어 보였다.
“이거 어떻게 푼 거야?”
“내가 보내 준 거 안 봤어? 메일 보냈잖아.”
“…….”
찔리는 게 있어서 침묵했다. 지헌은 안 봐도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리포트를 뺏어 책상에 내려놓고 나를 식당으로 인도했다.
“운이 좋았어. 다수설과 판례가 대립하는 주제들만 모아서 정리하고 있었거든. 근데 마침 교수님이 그중에 한 개를 리포트로 내신 거야.”
“……!”
나는 우뚝 멈춰 섰다. 학계와 실무가 서로 반대되는 주제들이라니, 확실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긴 했다. 나는 강의 내용을 소화하기에 급급해 그런 것만 모아서 따로 정리할 생각은 못 했지만.
그런데 그런 주제가 많나? 몇 개 안 될 텐데.
머릿속으로 재빨리 목차를 떠올리며 손으로 꼽아 보았다.
“많진 않아. 한 20개?”
“아하.”
고개를 끄덕이며 정지헌 책상 위를 흘끔거렸다. 지헌은 내심 보고 싶어 하는 내 눈치를 알아채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밥 먹고 보여 줄게.”
식탁 위에는 간단한 토스트와 스크램블드에그가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1인분이다.
“넌 안 먹어?”
“너 깨어나기 전에 간단히 먹었어.”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지헌은 맞은편 싱크대에 기대서서 아침 먹는 내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흥미로운 걸 관찰하는 얼굴 같기도 했고, 하여간 사람 불편할 정도로 구석구석 뜯어보는 느낌이라 먹던 숟가락을 내리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
“너 늘 이런 식으로 남자 만났어?”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숟가락을 든 채 되물었다.
“뭐?”
“연애해 본 적 없지? 근데 또 남자 경험이 없는 것 같진 않아. 그러니 늘 이런 식으로 남자 만났냐고.”
이런 식?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같이 놀아 놓고 욕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지헌은 머그잔을 기울이며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싱크대에 느긋이 기대선 몸짓과 달리 날 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같이 진탕 잘 놀아 놓고 왜 저래?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가볍게 웃었다.
“이런 식이 뭔데?”
“제대로 된 관계를 못 맺고 있잖아.”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답했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나는 눈을 내리깔고 숟가락으로 스크램블드에그를 뒤적이며 나직이 답했다.
“과거 묻는 남자 매력 없어.”
“난 아냐.”
돌아선 지헌은 컵을 개수대에 넣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 물소리가 그치고 지헌이 다시 돌아서 나를 향했다.
“난 네가 원해서 네 식대로 놀아 준 거야. 근데 이젠 그러기 싫어졌어.”
“그래서?”
짧게 되물으며 숟가락을 세워 소시지를 탁탁, 토막 냈다. 싫어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마찰음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컸다.
성큼 다가온 지헌은 맞은편 식탁을 짚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바짝 수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지헌의 눈동자에는 채 해소하지 못한 욕망이 들끓었다. 그럴 상태일 때의 눈이었다.
아침까지 기분 상큼해 보이더니? 얘는 갈수록 상태가 널을 뛴다. 아침부터 뒹굴 생각이 없던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읏.”
불쑥 뻗어 온 손이 억지로 내 턱을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쨍그랑,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흡,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슬슬 참는 것도 한계야. 내가 너 많이 봐준 거 알지.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나한테 와. 넌 어차피 나한테 오게 되어 있어.”
지헌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미친놈.
이게 고백인지 협박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자기가 뭘 그렇게 참았다고. 왜 또 발동이 걸린 건지. 또 뭔가 자기 신경에 거슬렸겠지.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모르겠다.
인정하자. 나는 이제 지헌을 예상할 수 없다. 그래도 애는 착해서… 는 개뿔.
나는 한참 전부터 지헌을 컨트롤할 수 없다고, 버겁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헌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아까의 일을 곱씹으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도착한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별일이다. 엄마는 일 나가고 애리 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날 텐데.
성인이고 스스로 떳떳하지만 그래도 남자 집에서 밤새 있다 온 터라 얼굴 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대문 너머를 흘끔 확인하고 일부러 미적거리며 우편함을 뒤적였다. 습관적으로 이름을 확인하며 우편물을 넘기다가 엄마 이름에서 멈칫했다. 보낸 사람에 대부업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다.
급히 찢어발기듯 입구를 뜯고 안의 내용물을 펼쳐 들었다. 일, 십, 백, 천… 영을 몇 번을 세었다. 엄마 앞으로 된 채무가 총 3천. 손이 가늘게 떨린다.
훅, 숨을 들이마시고 사나운 기세로 문을 밀어젖혔다. 철로 된 문은 반대쪽 벽에 부딪혀 쾅쾅, 연이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애리 아버지는 심각한 얼굴로 마루에서 빽빽 담배를 피웠고 그 옆에 선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내게 무어라 다급히 손짓했다. 그러나 눈이 돌아간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다 계시네요.”
이윽고 애리 아버지의 사나운 눈이 나를 향했다.
“이거 뭐….”
우편물을 들이밀며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맨발로 내려온 애리 아버지가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콘크리트 바닥이 눈앞에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애리 아부지.”
엄마가 곡소리를 내며 애리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거 놔, 안 놔?”
“아이고 애리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애를 이렇게 때리면 어떡해요.”
“저년이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애리 아버지는 이미 한잔 걸쳤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벌떡 숨을 내쉬었다. 그때마다 독한 소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휴, 이놈의 지지배! 너 도대체 남자랑 밤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아주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애리 아버지가 뭐라고 하기 전에 부리나케 튀어나온 엄마가 선수 쳐서 내 등을 후려쳤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애리 아버지는 뒤에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엄마는 연신 내 등을 후려치며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집 안으로 몰고 갔다.
“너 이리 와 봐! 아주 그냥 혼쭐을 내야지. 지지배가 어디서 겁도 없이.”
그러면서도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애리 아버지를 확인했다.
애리 아버지는 여차하면 뛰어들 기색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을 씩씩거렸다. 마당 구석에 선 애리는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억지로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엄마는 바깥 눈치를 살피며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아이고 이것아,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너 남자랑 밤마다 골목 입구에서 부둥켜안고 있었다며! 그 너한테 맨날 선물 안겨 준 동기인가 뭔가 하는 놈 맞지? 키 크고 곱상하게 생긴 놈. 나도 그놈 동네 입구에서 몇 번 얼쩡거리는 거 보긴 했다. 세탁소집 아저씨가 참다 참다 왔다고, 딸자식 교육 좀 잘하라고 느이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고 갔어. 그거 본 동네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더라. 너희 아버지 엄청 속상해했어. 네가 이해해.”
스킨십하는 장면을 보고 자기들끼리 숙덕숙덕 뒷말하다가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는 동네 사람들이나, 내가 남자와 있는 게 속상해서 술 마셨다는 애리 아버지나 다 징그럽게 느껴졌다. 가만히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으응?”
엄마는 내 눈을 피하다가 매서운 추궁에 우물쭈물 털어놓았다.
“너희 아버지 가게가 요새 좀 어렵잖아. 마지막으로 화물차 운전 한번 해 보겠다고 해서…. 그래도 먹고살아 보겠다고 마지막으로 도와 달라는데 어떡하니.”
내 눈치를 살피며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내가 안 그래도 이번이 끝이라고 단단히 말해 뒀어. 저 사람도 다시는 사고 칠 생각도 못 할 거다. 한 번 더 사고 치면 내가 이번엔 진짜 갈라서려고.”
애리 아버지 앞에서 과장되게 나를 혼낸 게 쇼였듯, 내 앞에서 애리 아버지를 과장되게 욕하는 것도 다 쇼였다.
이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늘 말로는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끝내겠다고 습관처럼 말해 왔다. 그 말을 믿고 주저앉았을 때도 있었다.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던 엄마는 이쯤에서 그친 것에 안심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거실 한구석에서 애리는 아직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애리 바지 사이로 졸졸 노란 오줌이 흘러내렸다.
나는 애리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목욕시켜 주었다. 구석구석 때도 밀고 머리까지 말려 주자 애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불 위에 애리를 눕히고 시계를 보자 이미 오전 수업 시간이 지나 있었다.
허름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마음속으로 염두에 두고 살아서인지, 물건이 많지 않았다. 간단한 옷가지와 물건 몇 가지만 가방 안에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애리 아버지는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를 틀어 놓고 마루에 누워 드르릉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부엌문 틈새로 엄마가 조용히 요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이 될지도 모르는데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무덤덤했다. 딱히 엄마가 원망스럽진 않다. 나는 단지 엄마를 포기하는 것뿐이다.
인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신발을 신었다. 골목 입구를 걸어 나오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대책 없이 나와서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학교에 가야 할지, 집부터 알아봐야 할지.
“미희야!”
갈림길에서 망설이는데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날아왔다. 부엌에서 일하던 그대로 슬리퍼만 꿰신은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엄마는 내 손에 꾸깃꾸깃한 봉투를 쥐여 주었다.
“이거, 이거 가지고 가.”
“…….”
내가 말없이 봉투를 바라보고만 있자 엄마는 내가 그대로 사라질까 두려운 듯 가방 속에 억지로 봉투를 집어넣고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응, 얼른 가.”
그러곤 손을 내저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여러 번 주저앉았다. 엄마는 내 뒤통수를 치다가도 꼭 콩만큼의 희망을 줘서 내가 떠나지 못하게 한다.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희망을 주고, 그 희망에 기대 나는 늘 주저앉았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애리 아버지 뒤치다꺼리하는 엄마를 욕했지만,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엄마를 버리지 못했다.
다섯 살 때인가, 나를 두고 도망갔다가 나 때문에 다시 돌아온 엄마. 그때부터 나는 죄인이 되었다.
차라리 그때 속 시원히 떠나 버리지. 독하지도 못해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시작되려나 보네.”
창밖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낮인데도 날이 희끄무레했다. 나갈 때쯤이면 한바탕 쏟아지겠는데.
“쌤, 예쁘셔서 좋겠어요. 인기 많으시죠?”
문제를 풀던 영우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원래도 공부하는 걸 싫어했지만 오늘따라 내 마음이 어수선한 걸 눈치채고 유독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딴 거 알 게 뭐야.”
퉁명스럽게 답하고 문제집을 가리켰다.
“문제나 풀어.”
“와, 이 자신감.”
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제집에 시선을 내렸다.
수업이 끝날 때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영우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요. 지하철역까지 제가 태워다 줄게요.”
“됐어. 우산 쓰고 가면 돼.”
가방을 챙기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됐어요. 차 가지고 나올게요. 천천히 현관으로 나오세요.”
차 열쇠를 집어 든 영우는 말리기도 전에 잽싸게 뛰어나갔다. 다시 부르려다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차에 올라탄 영우가 물었다. 나는 무심코 살던 동네를 말하고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집에서 나와 곧장 영우의 집으로 온 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지 문제였다.
“아니, 아니… 거기 말고. 학교 앞으로 가 줘.”
영우는 목적지를 번복하고 허둥대는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확인한 부재중 전화는 총 73통. 종일 수업을 통으로 빼먹었다 해도 과하게 많다. 정지헌의 지분율이 높을 것 같은 예감에 벌써 숨이 막힌다.
서둘러 통화 목록을 확인하는데, 지헌에게 온 전화는 34통뿐, 나머지는 모두 다은이, 승아 언니, 그 외 친분 있는 동기들에, 심지어 과 사무실에서 온 전화까지 있다.
이게 뭐야….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친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과 사무실에서 근로 아르바이트 하는 선배 언니였다. 휴대 전화 부재중 목록을 확인하다가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너 어떻게 된 거야? 전화는 또 왜 이렇게 안 받아.
숨도 쉬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
- 너 지헌이랑 무슨 일 있었니?
“네?”
언니와 통화 중에도 부재중 전화는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어 내고 들어오는 전화를 확인했다. 승아 언니였다. 휴대 전화를 반대쪽 귓가에 가져가며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돌아가는 상황이나 언니의 말투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창문에 비치는 영우를 신경 쓰며 계속 말씀하시라고, 작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언니의 말에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 너희 아버지가 수업 중에 뛰어 들어와서 정지헌 찾겠다고 아주 난리를 치다 가셨어. 과 사무실이고 뭐고 학교를 발칵 다 뒤집어 놓으셨어. 정지헌 나오라면서, 너 책임지라고 아주 난리였다.
“…….”
- 여보세요? 듣고 있니?
“…네.”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지헌이랑 사귀었니?
“저희 부모님… 아직도 거기 계세요?”
“지헌이가 모시고 갔어. 지헌이가 그때 공강이라 도서관에 있었거든. 나중에 소식 듣고 왔는데 좀 늦게 와서 일이 커졌지. 우리도 말리려고 하긴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고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
- 우린 처음에 이상한 사람이 헛소리하는 줄 알았어. 너희 전혀 그런 기미 없었잖아. 근데 지헌이가 오더니 좀 당황해 보이긴 해도 상황 딱 정리해서 너희 부모님 모시고 가더라고. 그래서 우리끼리 둘이 뭔가 있긴 한가 보다고 짐작한 거지 뭐.”
“…….”
- 너희 도대체 무슨 사이니? 뭘 했길래 부모님이 이러셔?
호들갑스러운 음성은 어느새 은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너희 도대체 뭘 했느냐고 묻는 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창백한 얼굴로 휴대 전화 키패드를 눌렀다. 자꾸만 손이 떨려서 오타가 났다. 백스페이스로 지우고 다시 누르기를 몇 차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신호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잠시 후 평온한 지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단숨에 말을 쏟아 냈다.
“너 지금 어디야.”
지헌의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휴대 전화 너머에서 애리야, 하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설마… 우리 집이야?”
“응.”
“미쳤어?”
“뭐?”
“네가 거길 왜 가!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거길 가! 그냥 못 본 척하지, 왜 거기까지 따라갔냐고!”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는 내게 지헌이 여유롭게 답했다.
“별일 없었으니까 안심해. 아버님이 너 걱정 많이 하고 계셔. 무작정 집을 나오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목소리였다. 더는 화도 안 난다.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 우리 아빠 아냐.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너는 절대 날 이해 못 할 거야.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해.”
“쌤, 괜찮아요?”
영우가 티슈를 내밀었다. 시큰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너 지금 옆에 누구야.”
시종일관 느긋하던 지헌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지헌에게 중요한 건 휴대 전화 너머 들리는 남자 목소리였다. 다시금 명치끝이 답답해지면서 마음속에 냉기가 차오른다.
“옆에 남자 누구냐고.”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는 재차 나를 추궁했다. 종종 내게 민낯을 보일 때마다 드러나는 집착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말도 없이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찌이잉, 손안의 휴대 전화가 즉시 요란하게 진동했다.
질린 눈으로 휴대 전화를 노려보다가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곤 가방 안에 거칠게 던졌다.
“쌤….”
영우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끊어 내고 싶은 인연일수록 더 질기게 엉겨 붙을까.
내 일인데 내 의사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화가 났고, 내 치부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인 것 같아 온몸이 화끈거렸다. 밀어낼수록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정지헌 그리고 가족들.
영원히 그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절망했다.
차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둑어둑한 하늘에, 멀리서 시커멓게 찰랑거리는 강이 보였다.
“좀 진정됐어요?”
“…….”
“저기… 나 아는 곳 있는데 거기 갈래요? 유학 간 형이 있던 곳인데 지금 빈집이에요.”
“아니, 그냥 근처 아무 지하철역에 내려 줘.”
“안 돼요. 이렇게 어떻게 보내요.”
“그럼 나 커피 좀 사다 줄래?”
“네, 기다려요.”
영우는 금방 온다며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고 밖으로 나갔다. 백미러로 영우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결국 학교밖에 갈 곳이 없었다. 도착할 때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편의점으로 피신했다. 우산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안 났다.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솨, 하고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소낙비에 거리는 인적 하나 없고 편의점도 한산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손에 쥐고 멍하니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멀리서 어슴푸레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비에 흠뻑 젖은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에게선 다급함과 초조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퍼붓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남자는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걷다가 뛰다가 지친 남자는 밝은 불빛을 따라 편의점 처마 밑으로 터덜터덜 들어왔다. 그러곤 컴컴한 도로 건너편을 묵묵히 응시했다.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순간에도 남자의 눈빛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렇게 절박해 보이는 얼굴은 또 처음이다.
나는 지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하긴 쟤 말고 누가 나한테 신경이나 쓸까. 그 언젠가 지헌과의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했던 말이지만, 지헌이 불쌍하다는 건 진심이다.
지헌은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이윽고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입을 꾹 다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지헌이 지나는 자리마다 철벅철벅 물웅덩이가 고였다.
휴대 전화를 들고 게임에 열중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지헌을 흘끔 쳐다보고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가까이 다가온 지헌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찾아다녔다고! 사람 걱정 좀 시키지 마! 어떻게 매번 그렇게 제멋대로야.”
목소리가 거칠게 쉬어 있다. 마주한 심장도 크게 오르내리며 펄떡였다.
지헌이 정말 화가 나서 내게 소리 지른 게 아니란 걸 안다. 말 속에는 종일 거리에서 나를 찾아다니며 느낀 초조, 불안 그리고 찾고 난 후의 안도감이 녹아 있다. 지헌의 품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
“나한테 마음 열기가 그렇게 힘들었어?”
안타까운 음성에 어쩐지 눈물이 났다. 정지헌 널 어쩌지…. 진짜 어쩌면 좋지.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혼자서 고생 많았어.”
지헌은 나를 붙잡고 절절히 속삭였다.
“앞으로는 나한테 기대. 내가 너한테 쉴 곳이 됐으면 좋겠어.”
나한테 기대.
그 순간 그 말이 너무 달콤하게 다가왔다.
많이 지쳤으니까 조금 쉬었다 가도 되지 않을까. 한 번쯤은.
프린트 위에 자를 대고 커터로 신중히 내리그었다.
머리 식힌다고 따로 시간 내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이참에 쌓인 자료들을 몽땅 프린트해서 오려 붙이는 단순 작업에 돌입했다.
새벽부터 책상에 앉아 칼질하는 나를 보며 지헌은 굳이 그걸 지금 해야 하느냐고 이해 못 할 얼굴을 했다. 그러다 내가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자 자신의 자료까지 몽땅 내게 맡겨 버렸다.
역시 머리가 복잡할 땐 단순노동이 최고였다. 뚱뚱해져서 제대로 닫히지 않는 교과서를 보며 뿌듯해서 미소 짓다가 아차 싶었다. 또 잔소리 듣겠네.
지헌은 뚱뚱해진 교과서도, 장황한 서브 노트도 좋아하지 않았다. 무조건 자료는 시험 전 한 시간 안에 훑어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지헌의 지론이었다.
알고 보니 긴 서브도 나를 위해서 작성한 것뿐, 본인은 목차와 키워드만 나열된 간이 서브를 선호했다.
나 같으면 누가 돈 주고 하라고 해도 못 할 짓인데 그런 거 보면 진짜 나를 좋아하긴 하는가 보지,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그때 책상 구석에서 휴대 전화가 울렸다. 이걸 받아, 말아. 순간 고민이 되었다.
지헌은 잠깐의 외출을 제외하고 내내 집에 머물러 있었다. 본인 나름은 일련의 사건을 겪은 나를 위로해 준답시고 내 옆에 붙어 있는 모양인데, 누가 누굴 위로해 준 것인지 모르겠다. 많이 참았다는 지헌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헌의 집에 오고 일주일 내내, 우리는 사회와 단절된 채 짐승처럼 뒹굴며 몸을 섞었다. 과외도 급하게 그만두고 서로 본능에 충실했다.
잠시 멈춘 휴대 전화가 이어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늘한 눈으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 지헌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조금 초조해하는 기색이었다. 통화하는 걸 대충 들어 보니 주말에 꼭 참석해야 할 가족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친척 결혼식이라고? 그럼 꼭 가야겠네.”
나는 좋아하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면서 덤덤히 말했다. 지헌이 거절한 모양인지 전화는 오늘 아침까지 걸려 왔다. 결국, 지헌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집을 나섰다.
확인 안 하고 아무나 문 열어 주지 마라, 반찬은 어디서 뭘 꺼내 먹어라. 나가기 전에 신신당부하더니, 나가서도 몇 번씩 전화를 해 대며 이미 했던 설명을 또 반복했다.
휴대 전화 진동은 끈질기게 울렸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무시하려 했지만, 마음이 불편해 결국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얹혀사는 주제에 끝까지 전화를 무시할 배짱은 없다. 신세 지기로 작정한 이상 굳이 문제 만들어서 좋을 것도 없겠고.
지헌은 왜 늦게 받았냐는 물음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 아직도 자료 오리는 중이야?
“어. 씻느라고 전화 온 거 몰랐어.”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언급했다. 그 말은 내 귀에도 너무 구차한 변명처럼 들려서 괜히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전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아니, 아예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겠지.
- 괜찮아. 넌 항상 나 기다리게 하잖아. 예쁘니까 그래도 돼. 귀엽게 봐줄 수 있어.
기분이 묘했다. 딱히 기분 나쁜 말투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칭찬도 욕처럼 들리는 걸까.
네가 유치하게 반항하는 거 다 알고 있고, 그 정도 까부는 건 봐줄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며칠 전, 우리는 아르바이트 문제로 싸웠고, 지헌은 기어이 내 뜻을 꺾었다.
지헌이 내게 잘 대해 주는 건 맞는데, 심사가 이상하게 꼬인 데가 있다고 해야 하나, 짓궂은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심사가 뒤틀리면 내게 못되게 굴었다.
나는 불편한 표정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겼다. 어차피 이미 다 지난 일이고, 나는 지헌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니까.
근데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라서, 이런 식의 기 싸움으로 소심한 반항을 했다. 유치한 짓이란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기분이 풀렸다.
- 난 여기서 9시쯤 출발할 것 같은데… 도착하면 10시쯤 되겠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 갈게.
“없어. 집에 먹을 거 많아.”
- 귀찮다고 굶지 말고. 냉장고에 초밥하고 볶음밥 있는 거 알지? 볶음밥은 데워 먹어. 누가 벨 누르면 꼭 누군지 확인하고 열고. 너 가만 보면 내가 대답도 안 하는데 문부터 덜컥 열더라. 자료도 적당히 오려.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나중에 어깨 결린다.
“네, 엄마.”
또다시 시작된 잔소리 폭격에 나는 고분고분 대답하는 척 비꼬았다.
- 장난으로 듣지 말고.
지헌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때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지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교수님께는 내가 연락드렸어. 동기들 입단속도 잘 시켰으니까 너무 걱정 마. 지금은 시끄러워도 몇 달만 지나면 금방 사그라들 거야.
지헌은 빠르게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글쎄. 내 생각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를 보면, 단순히 술자리 안줏거리로 끝날 주제가 있고 두고두고 몇 년 동안은 회자될 주제가 있다.
만약 우리 둘이 만났던 게 걸렸다면 단순히 안줏거리로 끝났겠지.
근데 이번 사건은 ‘걔 있잖아, 부모가 찾아와서 남자한테 행패 부렸던 애. 말도 마, 그때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로 시작해서 두고두고 몇 년 동안은 씹힐 주제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문자에서는 과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도 그때 사건 관련해서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어쩌면 자업자득일 수도 있겠다. 정지헌과 심심풀이 땅콩처럼 놀려다가 내가 심심풀이 땅콩처럼 씹히고 있으니까.
지헌이 내 번호를 없애 버려서 어디까지 소문이 번졌는지, 그 이후 상황은 잘 모르겠다. 이제는 뭐 어떻게 손쓸 수도 없고 그냥 남의 일 구경하듯이 무덤덤했다.
한 자세로 같은 동작을 오랫동안 반복해서인지, 지나간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목뒤가 뻐근했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뒤로 한껏 젖혔다. 그러다 문득 책장 구석에 꽂힌 조그만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직감으로 저거는 왠지 정지헌의 프라이버시가 담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덜컥 정지헌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지만, 지헌은 내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요즘 들어선 더더욱 예측할 수 없었다. 한집에 같이 거주하는 동거인으로서 나는 지헌을 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책장에서 다이어리를 빼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