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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한 소나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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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08 회 작성일 24-12-16 08: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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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한 소나타-10

 

10. 옥상에서

"우선 집에 가 있어. 퇴근하고 일찍 들어갈게. 그때 얘기하자."

무엇을? 더 이상 할 얘기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침착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남편은 굳은 표정을 짓고 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저 여자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나야말로 지금 버티고 있는 나도 다리가 경이로울 지경이야.

남편은 비서와 펠라티오를 즐기고, 마누라는 전철에서 한 남자와 음탕한 짓거리를 즐기고, 그 친구는 버젓이 있는 남편 말고도 애인을 구한다고 외치고 있어. 그리고 또 다른 한 친구는 돈 많은 양성애자야. 정말 재미있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잖아.

사랑? 그게 뭔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 있어? 이젠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야.

어른이 되면 그저 결혼해서 정기적인 섹스를 법적으로 허락 받거나, 아니면 눈 맞는 상대랑 오입질하고 돌아다니면 그만이지.

사랑이니 뭐니 찾는 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슬픈 블랙 코미디야.

나도 이젠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아. 아니, 훨씬 이전부터 그랬어. 아버지의 손에서 당신의 손으로 넘겨지던 날 그 이전에도 그랬지.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한마디도 못 할 것 같았다.

너무 많은 말은 자신이 어리석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과 같다는, 친정어머니의 현명하신 가르침에 잘 길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내 정신 상태가 미심쩍었는지, 남편의 전용 운전기사가 검은 중형차를 번뜩이며 마중 나와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그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정신없이 지나치는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이기적인 명령대로 차는 내가 제일 가고 싶지 않은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허탈한 공허감이 몸을 감쌌다. 이젠 어떡해야 하지.

아파트에 도착하자 나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리게 보이는 운전기사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필요 이상의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핸드백 속 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열쇠 꾸러미는 금세 잡혔다.

우선은 침대에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머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부러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느릿느릿하게 계단을 올랐다.

그래서인지 전혀 숨이 가빠지지 않았다.

"......!"

미선의 도발적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저 여자가 우리 집 현관 앞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는 걸까.

그녀도 나를 발견했다.

전에 입었던 눈이 시리도록 파랗던 원피스 대신에 밝은 노란 색 배꼽티와 하얀색 반바지를 입고 투명한 샌들을 신고 있었다.

무엇을 입어도 그녀는 돋보이는 타입이었다.

"주영아."

그녀는 관능적으로 도드라진 입술을 움직여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내 이름이 불리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도 얼떨결에 나를 향해 뛰어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야구 선수가 슬라이딩하듯이 몸을 필사적으로 밀어 넣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이 마구 떨려왔다.

"주영아! 잠깐만 기다려!"

절박하게 나를 불러대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그녀가 굽 높은 샌들로 뛰며 엘리베이터에 간신히 도착했을 때는 내 몸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위쪽으로 올라가 버린 후였다.

참았던 눈물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인제 그만 울고 싶어.`

어렸을 때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몸살이 났었다.

자정이면 움직인다는 동화를 믿고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졸음을 참다가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깨어보질 못해서 속상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12시가 되면 그 인형이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었다.

종일 나는 도망을 다녀야 했고, 그것에 지친 몸뚱이는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전철에서 그 남자의 손길로부터,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남편의 궁색한 변명에서도, 미선에게서도... 나는 언제까지 도망만 다녀야 하나.

내가 만든 유리성은 성이 아니라 모르모트 하얀 생쥐가 우왕좌왕하는 좁은 미로일 거야.

미로의 출구는 어디지? 그곳엔 먹이가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미끼가? 아니, 어쩌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아파트 건물의 맨 끝 층에 올라 옥상으로 통하는 녹슨 철문 앞에 와 있었다.

경비가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는지 철문은 활짝 열려 바람이 불 때마다 쾅 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이 부드럽게 손짓하고 있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석에 이끌리는 작은 핀처럼 빨려 들어가듯 옥상의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다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순간적인 충동이 일었다.

저 밑은 얼마나 평화롭게 보이는가.

드디어 하얀 생쥐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미로의 출구를 찾은 거야.

저 밑에는 아무것도 없어.

엄한 가정 교육을 받고 철두철미하게 보호받으며 교양으로 똘똘 뭉친 채 살아왔던 이주영은 이제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야.

나를 옭아매었던 모든 것들이여, 안녕.

나는 더 이상 허물어질 곳이 없는 거야.

사람들은 모두가 결국은 죽지.

그건 해피엔딩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비극도 아니야.

누가 오래 살고 짧게 사느냐의 차이일 뿐,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가장 중요하겠지.

더 추잡해지기 전에 미리 깨끗하게 내 의지대로 끝내는 게 제일 좋아.

어차피 나는 자살을 동경하고 있었으니까.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온갖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여태껏 나를 붙들어두었던 것은 오로지 착하고 올바른 딸로서, 그리고 정숙한 아내로서의 자리였다.

겨우 그런 것들에 연연해하며 살아왔던 내 인생이 비참했다.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심한 내 의지를 관철하고 싶었다.

더더욱 망가지기 전에.

파란 하늘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아파트 주차장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이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양손으로 난간을 잡고 뛰어올랐다.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양팔로 균형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떨어질 테니까.

나는 다음 단계를 진행하려고 숨을 들이마시고 멈추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빙글빙글 회전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이 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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